동보 김길웅 시인351 화수분 화 수 분 제주일보 2021.07.08 김길웅 칼럼니스트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화수분이라 한다. 물건을 담아두면 한도 끝도 없이 나온다는 요술 단지다. 침이 도는 꿀단지가 떠오르지만 화수분에 비할까, 얻고자 하는 게 다 나온다는데. 우리 설화에도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다는 나무꾼 얘기는 있지만, 이건 진시황 때, ‘하수분河水盆’에서 유래했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 군사 10만 명을 사역해 황하수를 길어다 구리 동이를 채우게 했단다. 그 동이가 얼마나 컸던지 물을 가득 채워 놓았더니, 써도 써도 바닥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하수를 채운 동이’라 ‘河水盆’인데, 무얼 넣어두면 끝없이 나온다는 보배 그릇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지금 세상에 실재한다.. 2021. 7. 9. 목소리 큰 사람 목소리 큰 사람 제주일보 승인 2021.07.01 김길웅 칼럼니스트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교통사고 현장을 보며 하는 말이다. 현장의 상황을 근거로 누구의 잘못인지, 일방적인지 쌍방인지 가려지는 게 교통사고인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니 말도 안되는 얘기다. 잘못을 뒤집어씌우려고 목소리로 겁박하고 보자는 힘의 논리다. 이런 억지가 없다. 밝은 세상이라 목소리 크기로 유·불리가 결정되는 건 옛날얘기일 것이다. 서부유럽을 여행할 때, 그곳 문화에 해박한 가이드에게서 영국의 날씨를 설명하며 사람들이 기후를 닮아 간다는 얘기가 흥미로웠다. 영국의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가 하는데 문득 해가 나 후텁지근한가 하면 이내 찬 바람이 불어 썰렁해진다. 도무지 예측 불.. 2021. 7. 2. 양산을 훔친 남자 양산을 훔친 남자 제주일보 승인 2021.06.24 김길웅 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산업화 문턱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궁핍 속에 예술혼을 불태운 화가 박수근. 그를 우리는 기억한다. 단조롭지만 소박한 서민 세계를 독창적 화법(畵法)으로 그려낸 화가다. 2021. 6. 25. 바람의 길 바람의 길 김길웅 칼럼니스트 만물 중에 몸 제일 가벼운 게 바람이다. 날개까지 달았으니 자유자재다. 부러움을 넘어 샘이 난다. 공중을 나는 새를 숭배하지만, 아니다. 새를 날아오르게 한 힘이 바로 맞바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저는 가벼우면서 무거운 걸 들어 올리고, 멀리 날게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실체는 분명 있다.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바람은 한곳에 머물러 정체하지 않는다. 허공이 그의 처소이고 그의 운신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능하므로 발길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의 공간이 그의 거소다. 유추컨대 처음부터 특정한 곳이 없었으리라. 그뿐 아니라 정체불명이다. 우리는 바람을 쉽게 말하면서 손아귀에 넣어 만지되 장악해 본 적이라곤 없다. 스칠 뿐 그의 길목에 .. 2021. 6. 18. 깊은 강물 깊은 강물 김길웅 칼럼니스트 영혼 위에 얼마나 많은 기분이 노는가. 길을 가다가 무심결에 어깨만 부딪쳐도, 사람 들끓는 지하철에서 살짝 발을 밟혀도, 사람들은 욱! 하는 마음에 낯 붉혀 가며 벌컥 화를 내기 십상이다. 실수한 사람이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데도 목소리를 한껏 높여 상대방을 꾸짖는다. 한순간의 일이다. 숫제 숨을 고르려 않는다. 잠시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리 화낼 것까지는 없는 일인데, 일단 소리부터 지르며 상대방을 윽박지른다. 자그마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외려 웃음 띤 얼굴로 눈앞의 작은 상황을 정리하려 할 것이다. 상대가 정중히, 몇 번을 사과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레프 톨스토이는 “깊은.. 2021. 6. 11. 단순화 단순화 김길웅. 칼럼니스트 늦가을 하늬가 기세를 올리면 어머니는 바람을 등지고 키질을 했다. 타작 뒤, 마당을 휩쓰는 바람에 지푸라기가 날려 난분분했다. 둥그런 멍석을 펴고 옆에는 도리깨질로 타작한 콩을 잔뜩 쌓아놓았다. 가을 해는 턱없이 짧다, 땅거미가 내리려 마당 구석으로 팽나무 그림자가 얼씬거린다. 어머니 손놀림이 빨라지며 속도를 낸다. 바가지 가득 키에 올려놓고 치대면 바람이 콩 껍질을 날렸다. 여러 번 하면 키에 콩알만 남는다. 키질은 콩 껍질을 분리하기 위해 바람을 이용한 선별 작업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키질하는 어머니 두 팔이 밑으로 처지지만 곁엔 콩알이 수북이 쌓인다. 요즘엔 밭에서 경운기 바퀴로 타작하고 그 자리에서 선풍기를 틀어 키질을 대신한다. 힘이 덜 드는데 일의 진행은 빨라졌다. .. 2021. 6. 5. 작은 행복들 작은 행복들 김길웅. 칼럼니스트 한라산은 산이면서 제주섬이다. 천년을 산으로 앉았지만, 오늘 아침은 좀 별스럽다. 언제 한 점 구름까지 쓸어냈는지 흔치 않던 표정이다. 절정에서 양 어깻죽지로 흘러내린 선 따라 꿈틀꿈틀 산의 능선이 불쑥거린다. 잔설을 말끔히 슬어냈으니 겨우내 지고 있던 짐을 부려놓아 홀가분한가. 상큼하게 웃고 있다. 이런 날이면 무겁고 어둡던 우울의 옷을 벗어 던지며 나도 괜히 행복하다. 난은 무심하지 않았다. 무엇이 고물거리는 것 같았지만 기연가미연가했는데 비죽이 내밀었다. 영락없는 꽃대다. 스무 해를 기다렸더니 이제 보여주려는가. 물주고 솜으로 닦아 주고 바람 골라 들이고 밤엔 달빛도 홀리고…. 허구한 날 숨죽여 다가앉았더니 마음을 앞세우는구나. 며칠 뒤 흠흠 맡을 네 배냇내 황홀하겠.. 2021. 5. 28. 스승의 날 선물 스승의 날 선물 김길웅. 칼럼니스트 지난 14일, ‘안경 너머 세상’에 이란 글을 올렸다. 달력도 유정한가. 뒷날이 스승의 날, 토요일이라 공교롭게 쉬는 날이었다. 선생님들 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됐다 했을까. 학생들은 어땠을까. 어차피 학교가 쉬고 넘어가니 됐다 했을까.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마음 무거운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월요일이면 이틀이 지나 있을 테니, 조금은 마음 추슬렀을지 모른다. 교단을 떠나온 지 16년째다.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 버리지만 학생들과의 추억은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입 본고사로 가팔랐던 그때, 힘겨웠던 일들이 눈앞에 주저리주저리 매달려 있곤 한다. 아마 평생 머릿속에 맴돌며 나를 그 시절로 불러들일 것이다. 학생에게 희비를 갈라놓던 합·불은 감격이면서 고통이었다.. 2021. 5. 21. 씁쓸한 스승의 날 씁쓸한 스승의 날 김길웅. 칼럼니스트 선생님들에게 스승의 날은 목의 가시 같은 날이다. 시류(時流) 따라 이러저러하다더니, 출근길 발걸음이 무겁고 씁쓸한 날이 돼 버렸다. 김영란법을 들여다보며 깜짝 놀란다. 소소한 음료수 한 병이나 개인적으로 선물하는 카네이션도 금지돼 있잖은가. 그러면서 학생들이 직접 쓴 편지나 공개적으로 여러 명의 대표로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 주는 것은 허용한다고 돼 있다. 그게 청탁금지법인 걸 모르지 않지만, 참 비현실적이다. 악법도 법이니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토 하날 달려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학생으로서 스승의 날에 존경과 감사의 뜻을 담아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는 것도 안된다니. 교권을 존중하고 스승 공경의 사회 풍토를 조성해 교원의 사기를 북돋는다고 특정한 날 아닌가. 적.. 2021. 5. 14. 해묵은 수첩 해묵은 수첩 김길웅. 칼럼니스트 무료해 여기저기 뒤적이다 책상 서랍에서 수첩 하날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서른 해를 살던 읍내 집을 떠나오며 많은 것을 버리고 왔는데, 붙어 왔으니 예사 인연이 아니다. 금박이로 대입 종합반 ‘現代學院’이라 적혀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이라 했고 전화번호가 여럿 달려있어 학원 냄새가 난다. 내게 온 경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메모를 조금 하게 됐고, 주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게끔 칸칸이 나뉜 실용적인 수첩이다. 이삿짐을 싸며 오래된 거라서 버리기가 아쉬워 무의식중 속에다 쑤셔 넣었을 것이다. 제작연도가 나왔지 않아 정확지는 않으나 수중에 넣은 지 어림짐작으로 50년은 됐을 법하다. 대하고 보니 우선, 이런 수첩이 있었나 싶게 사뭇 낯설다. 서랍 속 비좁은 공간에서 오.. 2021. 5. 7.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 3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