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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 김길웅 시인346

어느 겨울날의 고요 어느 겨울날의 고요   김길웅, 칼럼니스트 살고 있는 이 동네가 썩 마음에 든다.  읍내로 교통도 좋거니와 무엇보다 이웃이 수더분하고 순박해서 좋다.  더욱이 자기 일에 성실해 실답고 미덥다. 다들 감귤농장으로 바빠  일 년을 두고 한두 마디 말을 주고받는 정도이니, 이게 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려니 한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선지 몸에 밴 부지런에  심성들이 곱다. 엊그제 강풍이 휩쓸고 지나더니 바람도 나뭇가지 끝을 하늘거리게  스쳐 미풍인 데다, 아침부터 일찌감치 와선 저 혼자 재잘거리는  멧새 울음이 한층 고즈넉한 정원의 적막을 돋운다,  그 행간으로 내리는 시골 와옥(蝸屋)의 이 고요. 고요가 깊어 숨을 죽인다.  어지간하면 실없는 얘기라도 엮으련만 다들 집을 비운 건가. .. 2025. 1. 31.
'설'이 변하고 있다. '설'이 변하고 있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세상을 바꿔놓는 것이 시류, 시대의 물결이다.  이 물결이 물폭탄이라도 맞은 듯 순식간에 급류로 흐른다.  의식주와 풍속의 변화가 놀랍다. 가파르고 변화무쌍하다.  소중히 여기던 가치가 별안간 몰가치로 영락하는 경우도 있다.  불의 심판으로 빚어낸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년 세월에도  불변임에 감탄한다. 닷새 후면 설이다.  살아가는 시름을 놓고 현실의 고통도 잠시 저버리고 아들딸이  부모에게 절하고 형제끼리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끌어 안는 날이다.  추석보다 앞세우는 것은 한 살을 더 먹는 기쁨에 가슴 설레서일까.  더욱이 하던 일상의 일을 잠시 접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달려가  어머니 품에 와락 안기는 감격을 무엇에다 견줄까. 한데 요즘 2030 세대들의 취.. 2025. 1. 24.
가방의 무게 가방의 무게   김길웅, 칼럼니스트 시대를 공유하는 일이지만 내게도 가방의 유래는 유별하다.  가방이 흔치 않던 시대, 내 아잇적 책가방은 학생이라는 의미였다.  한데 초등학생 때, 내겐 책가방이 없었다.  보자기를 허리에 묶고 다녔다. 책보라 했지 책가방이라고 하지  않았다. 교과서도 얄팍하고 공책도 몇 장짜리였으니 가능했지,  지금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묶은 보자기를 돌려 어깨에 메는 개구쟁이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너도나도 허리에 불룩하게 책보를 업고 있는  아이들 등하굣길은 진풍경이었을 테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교복에 책가방이 생겼다.  가슴 뛰고 신이 났다. 양쪽 2개의 방에 책을 겹겹이 세우고 손잡이  둘을 한데 맞대어 들고 나서면 어깨도 으쓱해 세상을 다 넣고  다니는 기분.. 2025. 1. 17.
경계(璟界) 경계(璟界)   김길웅, 칼럼니스트 어둠과 밝음의 경계, 밤과 낮의 경계, 나라와 나라의 경계,  남과 북의 경계, 아이와 어른의 경계, 불교와 기독교의 경계,  유정과 무정의 경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  도시와 시골의 경계…. 경계는 자연현상과 시간,  혹은 문명이나 문화의 편차가 빚어내겠지만 사유와 철학,  정서나 환경 혹은 심미적 탐구의 산출물이기도 하다. 사람은 평생 앞에 놓인 무수한 경계를 넘으면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 연마하고 도전하고 고뇌하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탁월한 수월성으로 단숨에 뛰어넘기도 하나,  성채처럼 버티고 선 경계 앞에 시도 뒤, 수없는 시행착오로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광막한 사막은 횡단하려는 자에게  특별한 가시적 경계가 없다. 뒤덮인 모래 위를 몰아치.. 2025. 1. 10.
개연성(蓋然性) 개연성(蓋然性) 김길웅, 칼럼니스트 취직 시험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초조할 것이며,  군대 간 아들의 첫 휴가를 손꼽아 가며 갓 쉰에 이른 젊은 엄마의  기다림은 얼마나 애탈까. 호사스러운 기다림도 적잖다. 가을 타는 소녀는 바람에 잎이  구르기를 기다리고, 멋진 코트를 꺼내 입고 가까운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 눈 펑펑 쏟아지는 겨울을 기다리는 중년도 있을 것이다.  오래 고향을 등진 사람은 환향의 그날을 학수고대할 것이고,  아담한 집 한 채 이고 살아봤으면 하는 사람은 우연만 해 읍내에  조그만 마당이 있는 집 지을 날을 ‘바를 正 자’를 채우며  기다리고 기다릴 것이다. 사랑하는 혈육이 실직으로 방황할 때,  직장 하나 생겼으면 하는 기다림은 이거야 죽을 맛이다. 지난해 봄부터 여름, 가.. 2025. 1. 3.
놓아버림 놓아버림   김길웅, 칼럼니스트 놓아버렸다. 45년을 해온 교직을 놓아버렸다.  그동안 내가 가르친 제자들, 삶의 무늬가 새겨진 기억들을 함께 놓아버렸다.  이름을 놓아버리고 웃음을, 추억을 놓아버렸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을 담은  졸업사진을 놓아버리고 사진 속의 이야기를 놓아버렸다.  소각은 완전한 놓아버림, 소멸이었다. 이 나이를 살아오며 인연의 끈으로 이어오던 그 많은 정과 사랑과 관계를  놓아버렸다. 깊었던 것, 얕았던 것, 맑은 영혼의 말, 어둠 속에도 주고받던  희망의 말 다 놓아버렸다. 믿음, 소망, 꿈, 이상 같은 것들 -기다림 속에  끌어당기고 싶던 그 모든 것들을 놓아버렸다.  놓아버릴 수 없게 에워싸던 미련의 어설픈 감정들,  그 편린까지도 다 놓아버렸다. 내 마음으로부터 놓아버렸다.. 2024. 12. 27.
남는 것 남는 것   김길웅, 칼럼니스트 나무나 돌을 다듬는 일의 현장에는 지저깨비가 널려 있다.  버려진 것들로 너저분하다. 깎고 쪼고 다듬어 내면서 남은 쪼가리들이다.  깨어지고 부서지면서 원형을 잃는다고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남는 것도 쓸모가 있다. 지는 잎도 찬바람에 곱게 단풍이 든다.  잎들은 질 때를 알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떠나는 길에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곱게 치장한다.  가을 단풍은 그래서 현란하다.  때를 알아 가을날 나무는 잎을 내려놓는다.  수수만만의 잎들. 모체와 완전히 분리되는 데도 낙엽이기를 거역하지  않는다. 찬바람에 실려 허공을 나풀거리다 나무 아래로 진다.  회귀본능이다. 낙엽은 한곳으로 수북이 쌓여 혹한에 뿌리를 덮어 주는  이불이 된다. 솜이불 못지않게 .. 2024. 11. 22.
내 범위 내 범위 김길웅, 칼럼니스트 사람은 손발이 닿는 어느 반경에서 한정적 삶을 살아간다.  일상을 벗어나지 않아 늘 드나드느니낯익고 임의롭다.  낯설지 않은 정해진 구도에 몸을 놓으면 심신이평안하다.  어제 만났던 얼굴과 오늘도 대면할 수 있는 개연성이  마음을 들뜨게도 한다.  일에 진전이 없거나 변화가 없을 때는 그 범위에 갇힌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다고 현실에서 범위의 확산이 손쉽지 않다.  한 걸음 내디디려 하다가도 다니던 길이 익숙해 주저앉기도 한다. 내 범위가 상당히 줄고 좁혀 드는 것 같다.  범위의 축소는 시간도 짧아지면서 머무는 공간도 눈에띄게 줄고  좁혀 든다.  마치 골목을나와 고샅을 지나 마을로 뻗어나 가던 아잇적 생활의  사회화가 어느 날 맴돌다 골목으로 들어와 갇혀 버리는.. 2024. 11. 15.
귀화를 원합니다 귀화를 원합니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우리의 한국명은 ‘개민들레’입니다.  사람들이 ‘빛 좋은 개살구’라 하는 그 ‘개’ 자를 접두사로 얹었군요.  어떡합니까. 사람들마다 한입이 돼 부르는 이름인걸요.  ‘개’ 자의 뉘앙스를 모르지 않습니다. 개떡,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듯 ‘참’이 아니라는, 가짜라는 걸. 실은 마뜩잖아요. 그렇게까지 홀대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이곳에 온다 한 적이 있나요.  사람의 봄에 붙어 멀리서 멀미하며 긴 항해 끝에 이른 곳이  바로 이 섬이었습니다. 우리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륙이었지요.  제주는 풍광이 수려한 데다 따스한 햇볕과 살랑대는 훈풍이 참  감미로웠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제주 사람들은  자연에 동화돼 선량합니다. 남.. 2024. 11. 8.
가을 아침 단상 가을 아침 단상   김길웅, 칼럼니스트 꽃 지고 난 자리로 열매 맺는다.  가을 갈무리는 넉넉하고 옹골차다.  허한 자락을 수확의 풍요로 채우는 계절, 가을은 언제나 충실하다.  들뜬 서정 뒤, 숨 고르기에 들어간 수필의 결말 문단 같다.  아침 기운이 쇄락하다. 산산한 바람에 머릿속이 뻥 뚫린다.  새벽이 지났는데도 실솔의 울음소리 청랑해 분위기 속으로 뜨고  가라앉는다. 무더위에 부대끼며 목마르게 기다려 온지고 맺는 사상(事象)을 소재로  끌어안으면 내 문학이 걸쭉하고 비옥해질지도 모른다.  시를 읊듯 매끄럽게, 지나는 계절을 내 운율 속으로 붙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들과 만남과 헤어짐 뒤의 가지런한 융합의 질서는 얼마나 찬연한  것인가. 며칠 뒤, 산야엔 단풍으로 지천, 현란한 스펙트럼의 파장.. 2024.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