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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 김길웅 시인344

가방의 무게 가방의 무게   김길웅, 칼럼니스트 시대를 공유하는 일이지만 내게도 가방의 유래는 유별하다.  가방이 흔치 않던 시대, 내 아잇적 책가방은 학생이라는 의미였다.  한데 초등학생 때, 내겐 책가방이 없었다.  보자기를 허리에 묶고 다녔다. 책보라 했지 책가방이라고 하지  않았다. 교과서도 얄팍하고 공책도 몇 장짜리였으니 가능했지,  지금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묶은 보자기를 돌려 어깨에 메는 개구쟁이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너도나도 허리에 불룩하게 책보를 업고 있는  아이들 등하굣길은 진풍경이었을 테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교복에 책가방이 생겼다.  가슴 뛰고 신이 났다. 양쪽 2개의 방에 책을 겹겹이 세우고 손잡이  둘을 한데 맞대어 들고 나서면 어깨도 으쓱해 세상을 다 넣고  다니는 기분.. 2025. 1. 17.
경계(璟界) 경계(璟界)   김길웅, 칼럼니스트 어둠과 밝음의 경계, 밤과 낮의 경계, 나라와 나라의 경계,  남과 북의 경계, 아이와 어른의 경계, 불교와 기독교의 경계,  유정과 무정의 경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  도시와 시골의 경계…. 경계는 자연현상과 시간,  혹은 문명이나 문화의 편차가 빚어내겠지만 사유와 철학,  정서나 환경 혹은 심미적 탐구의 산출물이기도 하다. 사람은 평생 앞에 놓인 무수한 경계를 넘으면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 연마하고 도전하고 고뇌하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탁월한 수월성으로 단숨에 뛰어넘기도 하나,  성채처럼 버티고 선 경계 앞에 시도 뒤, 수없는 시행착오로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광막한 사막은 횡단하려는 자에게  특별한 가시적 경계가 없다. 뒤덮인 모래 위를 몰아치.. 2025. 1. 10.
개연성(蓋然性) 개연성(蓋然性) 김길웅, 칼럼니스트 취직 시험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초조할 것이며,  군대 간 아들의 첫 휴가를 손꼽아 가며 갓 쉰에 이른 젊은 엄마의  기다림은 얼마나 애탈까. 호사스러운 기다림도 적잖다. 가을 타는 소녀는 바람에 잎이  구르기를 기다리고, 멋진 코트를 꺼내 입고 가까운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 눈 펑펑 쏟아지는 겨울을 기다리는 중년도 있을 것이다.  오래 고향을 등진 사람은 환향의 그날을 학수고대할 것이고,  아담한 집 한 채 이고 살아봤으면 하는 사람은 우연만 해 읍내에  조그만 마당이 있는 집 지을 날을 ‘바를 正 자’를 채우며  기다리고 기다릴 것이다. 사랑하는 혈육이 실직으로 방황할 때,  직장 하나 생겼으면 하는 기다림은 이거야 죽을 맛이다. 지난해 봄부터 여름, 가.. 2025. 1. 3.
놓아버림 놓아버림   김길웅, 칼럼니스트 놓아버렸다. 45년을 해온 교직을 놓아버렸다.  그동안 내가 가르친 제자들, 삶의 무늬가 새겨진 기억들을 함께 놓아버렸다.  이름을 놓아버리고 웃음을, 추억을 놓아버렸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을 담은  졸업사진을 놓아버리고 사진 속의 이야기를 놓아버렸다.  소각은 완전한 놓아버림, 소멸이었다. 이 나이를 살아오며 인연의 끈으로 이어오던 그 많은 정과 사랑과 관계를  놓아버렸다. 깊었던 것, 얕았던 것, 맑은 영혼의 말, 어둠 속에도 주고받던  희망의 말 다 놓아버렸다. 믿음, 소망, 꿈, 이상 같은 것들 -기다림 속에  끌어당기고 싶던 그 모든 것들을 놓아버렸다.  놓아버릴 수 없게 에워싸던 미련의 어설픈 감정들,  그 편린까지도 다 놓아버렸다. 내 마음으로부터 놓아버렸다.. 2024. 12. 27.
남는 것 남는 것   김길웅, 칼럼니스트 나무나 돌을 다듬는 일의 현장에는 지저깨비가 널려 있다.  버려진 것들로 너저분하다. 깎고 쪼고 다듬어 내면서 남은 쪼가리들이다.  깨어지고 부서지면서 원형을 잃는다고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남는 것도 쓸모가 있다. 지는 잎도 찬바람에 곱게 단풍이 든다.  잎들은 질 때를 알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떠나는 길에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곱게 치장한다.  가을 단풍은 그래서 현란하다.  때를 알아 가을날 나무는 잎을 내려놓는다.  수수만만의 잎들. 모체와 완전히 분리되는 데도 낙엽이기를 거역하지  않는다. 찬바람에 실려 허공을 나풀거리다 나무 아래로 진다.  회귀본능이다. 낙엽은 한곳으로 수북이 쌓여 혹한에 뿌리를 덮어 주는  이불이 된다. 솜이불 못지않게 .. 2024. 11. 22.
내 범위 내 범위 김길웅, 칼럼니스트 사람은 손발이 닿는 어느 반경에서 한정적 삶을 살아간다.  일상을 벗어나지 않아 늘 드나드느니낯익고 임의롭다.  낯설지 않은 정해진 구도에 몸을 놓으면 심신이평안하다.  어제 만났던 얼굴과 오늘도 대면할 수 있는 개연성이  마음을 들뜨게도 한다.  일에 진전이 없거나 변화가 없을 때는 그 범위에 갇힌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다고 현실에서 범위의 확산이 손쉽지 않다.  한 걸음 내디디려 하다가도 다니던 길이 익숙해 주저앉기도 한다. 내 범위가 상당히 줄고 좁혀 드는 것 같다.  범위의 축소는 시간도 짧아지면서 머무는 공간도 눈에띄게 줄고  좁혀 든다.  마치 골목을나와 고샅을 지나 마을로 뻗어나 가던 아잇적 생활의  사회화가 어느 날 맴돌다 골목으로 들어와 갇혀 버리는.. 2024. 11. 15.
귀화를 원합니다 귀화를 원합니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우리의 한국명은 ‘개민들레’입니다.  사람들이 ‘빛 좋은 개살구’라 하는 그 ‘개’ 자를 접두사로 얹었군요.  어떡합니까. 사람들마다 한입이 돼 부르는 이름인걸요.  ‘개’ 자의 뉘앙스를 모르지 않습니다. 개떡,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듯 ‘참’이 아니라는, 가짜라는 걸. 실은 마뜩잖아요. 그렇게까지 홀대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이곳에 온다 한 적이 있나요.  사람의 봄에 붙어 멀리서 멀미하며 긴 항해 끝에 이른 곳이  바로 이 섬이었습니다. 우리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륙이었지요.  제주는 풍광이 수려한 데다 따스한 햇볕과 살랑대는 훈풍이 참  감미로웠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제주 사람들은  자연에 동화돼 선량합니다. 남.. 2024. 11. 8.
가을 아침 단상 가을 아침 단상   김길웅, 칼럼니스트 꽃 지고 난 자리로 열매 맺는다.  가을 갈무리는 넉넉하고 옹골차다.  허한 자락을 수확의 풍요로 채우는 계절, 가을은 언제나 충실하다.  들뜬 서정 뒤, 숨 고르기에 들어간 수필의 결말 문단 같다.  아침 기운이 쇄락하다. 산산한 바람에 머릿속이 뻥 뚫린다.  새벽이 지났는데도 실솔의 울음소리 청랑해 분위기 속으로 뜨고  가라앉는다. 무더위에 부대끼며 목마르게 기다려 온지고 맺는 사상(事象)을 소재로  끌어안으면 내 문학이 걸쭉하고 비옥해질지도 모른다.  시를 읊듯 매끄럽게, 지나는 계절을 내 운율 속으로 붙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들과 만남과 헤어짐 뒤의 가지런한 융합의 질서는 얼마나 찬연한  것인가. 며칠 뒤, 산야엔 단풍으로 지천, 현란한 스펙트럼의 파장.. 2024. 11. 1.
고구마 고구마   김길웅, 칼럼니스트 ⑴…텃밭에 씨 고구마 심어 두둑 북돋우고,  해 묵힌 오줌 퍼다 뿌려주면 유월엔 한세상으로 우거졌다, 두 마장 걸어 내 눈대중에 가을운동회 날 달리기 50m 길이쯤 돼  보이던 사래 긴 밭을, 쟁기로 갈아엎으면 이랑을 내어 흙에 두엄  고루 섞어 밑거름을 깔았다. 어머니와 누나가 도막 낸 줄기를 등에  지고 날라, 밭에다 담상담상 꽂아가며 흙을 덮씌웠다. 때맞춰 비가 오신다. 대지를 적시는 젖줄 같은 단비다. 한여름 불볕 맞은 호박잎보다 더 늘어졌던 가녀린 것들이 장맛비에  파랗게 살아났다. 우리 어머니 함박웃음 터트렸던 연유를 한참  후에야 알았다. ⑵…문명을 능가하는 것이 있었다. 가난 속에 흙이 키워 내는 놀라운  생명성, 마침 우기라서 한철을 비가 넉넉히 내리면 그 .. 2024. 10. 25.
맹탕 맹탕   김길웅, 칼럼니스트 국처럼 펄펄 끓인 음식을 ‘탕(湯)’이라 한다.  갈비탕, 곰탕 등… 많다. 또 ‘별주부전에는 자라탕이 나온다.  개식용종식과 함께 보신탕은 법이 막아 나섰다. 반려견이 있는데 한쪽에서  음식으로 즐겨 먹는 건 사리에 맞잖다. 극복해야 할 모순이었다.  목엣 가시처럼 걸려 있던 걸 빼내 홀가분하다.  삼키려면 거꾸로 살에 박혀 드는 게 가시 아닌가.  서민들이 즐기는 매운탕이 있고, 손쉽게 식탁에 오르는 감자탕도 있다.  손맛이 뛰어나 팔도에 별미가 넘쳐나는 민족이다. 우리 음식치고 맹물같이 싱거운 국은 없다. 한데 탕에 맹물처럼 아주  싱거운 맹탕이 있다. 내용이 없으니 맹탕이다. 하는 짓이 옹골차지 못하고  싱거운 사람을 빗대어 ‘맹탕’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런 자가 일을.. 2024.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