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길
김길웅 칼럼니스트
만물 중에 몸 제일 가벼운 게 바람이다.
날개까지 달았으니 자유자재다. 부러움을 넘어 샘이 난다.
공중을 나는 새를 숭배하지만, 아니다.
새를 날아오르게 한 힘이 바로 맞바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저는 가벼우면서 무거운 걸 들어 올리고, 멀리 날게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실체는 분명 있다.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바람은 한곳에 머물러 정체하지 않는다.
허공이 그의 처소이고 그의 운신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능하므로
발길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의 공간이 그의 거소다.
유추컨대 처음부터 특정한 곳이 없었으리라.
그뿐 아니라 정체불명이다. 우리는 바람을 쉽게 말하면서 손아귀에
넣어 만지되 장악해 본 적이라곤 없다.
스칠 뿐 그의 길목에 나앉아 깊이 품어 본 적도, 눈으로 그려 본 적도
없다. 빛깔이 붉은지 노란지 아예 무색투명한지 알 수조차 없다.
실체를 붙들 수 없으니, 다만 그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흠뻑 옷을 적시면서 빗물은 목도하되,
몸을 흔들다 가버리는 바람은 이렇다 할 자취도 눈에 밟히지 않는다.
남기지 않으니 볼 수 없다. 나뭇잎이나 꽃이 떨어져 낙엽으로 혹은
낙화로 함께 흩날릴 때, 저게 바람의 몸짓인가 할 뿐이다.
그게 그가 머물다 떠나 버린 흔적이다. 뽐냄일까.
바람은 그가 스치고 지났음을 알리는 발자국 같은 맥락으로 제 존재를
실증하려는 의중일지 모른다. 그럴 것이다.
바람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자신을 느끼는 시인의 감성을 살짝
건드려 놓는다. 그것은 그럭저럭 하는 게 아니다.
엄연히 인과(因果)에 의한 스침이다.
진정 가벼워진 것이 보여주는 무심한 민낯으로 이내 떠나고 마는
바람이다. 아차 하는 순간, 저만치 달아나 그의 길 위를 가고 있다.
짧디짧지만 찰나의 만남이야말로 소중한 것이다.
몇 십 억분의 일, 확률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런 바람의 기척을 알아차리는 촉을 갖고 있어 바람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 바람의 시작을 알고 닿으려는 세계를 안다.
시인은 그래서 초월적이고 바람은 그런 시인과 기꺼이 합일한다.
그게 시를 통해 화답하는 것이라 사람을 감동케 하는 것이리라.
바람이 일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길 위를 떠도는 게 무작정한 것
같지 않다. 그건 바람만이 누리는 자유다. 그게 우리를 사유하게 하고,
흔들어 깨어나게 하리라는 생각에 이르러 더욱 바람의 걸음에 눈을
보내고 마음을 실어 그의 뒤를 따르려 하는지도 모른다.
별안간에, 중학교 때 여선생에게 풍금으로 배운 <성불사의 밤>이
떠오른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흥얼거린다. 산사의 밤이 지극히 적막했나 보다.
귀 기울이니 내면에 축적됐던 그때의 감동까지 불러낸다.
그윽한 풍경소리가 있어 산사가 더욱 적막했겠다.
풍경소리가 산사의 적막을 깨운다 했는데,
실은 풍경을 흔들어 놓고 지나는 바람이다.
단지 소리뿐 아니다. 고요한 산의 숨결이고
그 숨결에 실려오는 바람의 향기다.
바람의 길엔 향기가 있어 그게 사방으로 번진다.
첫여름이다.
후텁지근하지만, 훈풍이 우리 앞으로 길을 내고 있다.
오랫동안 역병으로 꽁꽁 얼어붙은 삶이다.
6월의 바람을 타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