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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 김길웅 시인346

피서(避暑)·내서(耐暑) 피서(避暑)·내서(耐暑) 김길웅 칼럼니스트 하늘에서 활활 화기(火氣)를 쏟아붓는데 바람 한 점 없다. 훅훅 치고 올라오는 지열, 불 지핀 한증막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올여름 폭염은 그냥 더위가 아니라 벌겋게 불붙는 불잉걸 속이다. 7월 들어 비 몇 차례 지적이더니 마가 걷혔다. 늦게 오더니 온데간데없다. 지각하더니 맘대로 조퇴해 버렸다. 32도는 붙박이, 폭염경보로 펄펄 끓는 날이 이어진다. 어느 기상캐스터의 말이 재치 있었다. “코로나19보다 무서운 게 폭염입니다.” 이럴 수가, 가만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옴짝하기도 싫은데 손에 무엇이 잡힐까. 능률 없는 일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런다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난감하다. 시간은 가는데 불더위 속에 멈춰 있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 2021. 8. 13.
여제(女帝) 여제(女帝) 김길웅 칼럼니스트 지난 7월 31일 밤, 왜 그를 여제라 하는지 목도했다. 5세트 접전 끝에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이 숙적 일본을 꺾고 대망의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막판에 일본이 침몰했다. 그야말로 쫓고 쫓기는, 물고 물리는 대역전극이었다. 불과 한 달, 발리볼 내셔널리그에서 3-0으로 완패했던 한국이 짜릿한 승리를 낚아 올린 중심에 배구 여제 김연경이 있었다. 나이 들어도 그는 산(山)이었다. 우뚝 솟은 산, 흔들리지 않는 큰 산이었다. 앞에선 무서운 파괴력으로 상대 진영을 흔들고, 후위에선 몸을 던져가며 공을 받아 건져 올렸다. 때리고 넘어오면 가로막고 공격과 리시브를 넘나들었다. 세터가 공을 처리하게 높이와 거리를 잰다. 자신을 집중 견제하는 상대의 손을 용케 뿌리쳐 가며 강약과 .. 2021. 8. 6.
간서치(看書癡) 지금의 서울 남산 간서치(看書癡) 김길웅 칼럼니스트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 아래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어눌해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해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했다. 바둑이나 장기는 더군다나 알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해도 변명하려 않고, 칭찬에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으며 오로지 책만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아픈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손에서 고서를 놓지 않았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으나 동서 남쪽으로 창이 있어 볕이 드는 방향을 따라 밝은 곳에서 책을 보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었는데.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구한 줄을 알았다. .. 2021. 7. 31.
부부 발소리에 자란 수박 부부 발소리에 자란 수박 제주일보 승인 2021.07.22 김길웅 칼럼니스트 7월 들어 며칠 비가 질척이더니 장마가 걷혔다. 조기 퇴장이다. 곧바로 폭염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아침부터 푹푹 찌기 시작한다. 33도로 첫 폭염경보라더니, 육지 어느 곳은 35도까지 끌어올렸다. 세상 벌컥 들쑤셔 놓은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게 폭염이란다. 기상 캐스터가 지레짐작으로 한 말이 아닐 것이다. 화기를 퍼트리며 아파트로 달려드는 햇볕에 베란다도 구실을 잊었다. 그런다고 블라인드를 내릴 수도 없다. 펄펄 끓어도 간간이 밖을 내다봐야 한다. 더위를 말없이 견뎌내는 숲이 있잖은가. 무풍한 데도 시종 부동으로 서 있는 나무들은 외려 이 여름을 즐긴다. 목표가 있다. 광합성으로 시간의 두께만큼 굵어 .. 2021. 7. 23.
아이들을 저렇게까지 아이들을 저렇게까지 제주일보 7월16일(금요) 김길웅 칼럼니스트 ‘제주 최대 규모 어린이집 학대 사건’, 하마터면 자지러질 뻔했다. 어린이집 아동 학대 사건 2차 재판이 열리는 법정. 그 현장의 폐쇄회로 영상을 보며 증거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약 30초 영상 10여 개가 안방으로 들어온다. 처음엔 귀와 눈을 의심했다. 차마 그렇게까지 했겠나. 그러했다. 그것은 명확한 사실이었고 명백한 실재였다. 영상이 있었던 일을 있던 대로 재현해내고 있지 않은가. 억지로 바나나를 먹이려다 싫다고 고개 돌리며 발버둥 하는 아이 입에다 억지로 우겨넣는다. 가만 앉아 있는 아이를 발로 걷어차며 옆의 아이에게 자기처럼 때리라 시키자 달아나는 아이를 붙잡아다가 바닥에서 질질 끈다. 잠을 자지 않는 아이를 밀친다.. 2021. 7. 16.
화수분 화 수 분 제주일보 2021.07.08 김길웅 칼럼니스트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화수분이라 한다. 물건을 담아두면 한도 끝도 없이 나온다는 요술 단지다. 침이 도는 꿀단지가 떠오르지만 화수분에 비할까, 얻고자 하는 게 다 나온다는데. 우리 설화에도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다는 나무꾼 얘기는 있지만, 이건 진시황 때, ‘하수분河水盆’에서 유래했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 군사 10만 명을 사역해 황하수를 길어다 구리 동이를 채우게 했단다. 그 동이가 얼마나 컸던지 물을 가득 채워 놓았더니, 써도 써도 바닥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하수를 채운 동이’라 ‘河水盆’인데, 무얼 넣어두면 끝없이 나온다는 보배 그릇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지금 세상에 실재한다.. 2021. 7. 9.
목소리 큰 사람 목소리 큰 사람 제주일보 승인 2021.07.01 김길웅 칼럼니스트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교통사고 현장을 보며 하는 말이다. 현장의 상황을 근거로 누구의 잘못인지, 일방적인지 쌍방인지 가려지는 게 교통사고인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니 말도 안되는 얘기다. 잘못을 뒤집어씌우려고 목소리로 겁박하고 보자는 힘의 논리다. 이런 억지가 없다. 밝은 세상이라 목소리 크기로 유·불리가 결정되는 건 옛날얘기일 것이다. 서부유럽을 여행할 때, 그곳 문화에 해박한 가이드에게서 영국의 날씨를 설명하며 사람들이 기후를 닮아 간다는 얘기가 흥미로웠다. 영국의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가 하는데 문득 해가 나 후텁지근한가 하면 이내 찬 바람이 불어 썰렁해진다. 도무지 예측 불.. 2021. 7. 2.
양산을 훔친 남자 양산을 훔친 남자 제주일보 승인 2021.06.24 김길웅 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산업화 문턱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궁핍 속에 예술혼을 불태운 화가 박수근. 그를 우리는 기억한다. 단조롭지만 소박한 서민 세계를 독창적 화법(畵法)으로 그려낸 화가다. 2021. 6. 25.
바람의 길 바람의 길 김길웅 칼럼니스트 만물 중에 몸 제일 가벼운 게 바람이다. 날개까지 달았으니 자유자재다. 부러움을 넘어 샘이 난다. 공중을 나는 새를 숭배하지만, 아니다. 새를 날아오르게 한 힘이 바로 맞바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저는 가벼우면서 무거운 걸 들어 올리고, 멀리 날게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실체는 분명 있다.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바람은 한곳에 머물러 정체하지 않는다. 허공이 그의 처소이고 그의 운신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능하므로 발길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의 공간이 그의 거소다. 유추컨대 처음부터 특정한 곳이 없었으리라. 그뿐 아니라 정체불명이다. 우리는 바람을 쉽게 말하면서 손아귀에 넣어 만지되 장악해 본 적이라곤 없다. 스칠 뿐 그의 길목에 .. 2021. 6. 18.
깊은 강물 깊은 강물 김길웅 칼럼니스트 영혼 위에 얼마나 많은 기분이 노는가. 길을 가다가 무심결에 어깨만 부딪쳐도, 사람 들끓는 지하철에서 살짝 발을 밟혀도, 사람들은 욱! 하는 마음에 낯 붉혀 가며 벌컥 화를 내기 십상이다. 실수한 사람이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데도 목소리를 한껏 높여 상대방을 꾸짖는다. 한순간의 일이다. 숫제 숨을 고르려 않는다. 잠시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리 화낼 것까지는 없는 일인데, 일단 소리부터 지르며 상대방을 윽박지른다. 자그마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외려 웃음 띤 얼굴로 눈앞의 작은 상황을 정리하려 할 것이다. 상대가 정중히, 몇 번을 사과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레프 톨스토이는 “깊은.. 2021.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