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물
김길웅 칼럼니스트
영혼 위에 얼마나 많은 기분이 노는가.
길을 가다가 무심결에 어깨만 부딪쳐도, 사람 들끓는 지하철에서
살짝 발을 밟혀도, 사람들은 욱! 하는 마음에 낯 붉혀 가며 벌컥 화를
내기 십상이다. 실수한 사람이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데도
목소리를 한껏 높여 상대방을 꾸짖는다.
한순간의 일이다. 숫제 숨을 고르려 않는다.
잠시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리
화낼 것까지는 없는 일인데, 일단 소리부터 지르며 상대방을 윽박지른다.
자그마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외려 웃음 띤 얼굴로 눈앞의 작은
상황을 정리하려 할 것이다. 상대가 정중히, 몇 번을 사과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레프 톨스토이는 “깊은 강물은 돌을 던져도 흐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의 마음을 깊은 강물에 빗대면서 “모욕을 당했다고 화를 버럭 내는
사람은 얕은 사람”이라 한 것이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일수록 화를 잘
내고, 인격 수양이 덜 된 사람일수록 참을성이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사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혼자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 사람 사이에 부대끼면서 항다반사로 겪는 일들
가운데 작은 일부일 뿐이다. 누군가 자신을 화나게 한다면,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게 순서다. 흐르는 물 앞에 자신을 세워
놓아야 한다. 얕은 시냇물은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흐려지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를 뿐이니까.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 때,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일제히 하나가
돼 묵상하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었지만 분명, 마음속에는 ‘들끓는 기도’가 있었을 것이다.
신자가 아니어도 가슴속으로 한 줄기 서늘한 강물이 흘렀다.
한데 왜일까. 어디를 가나 소리만 무성하다. 방송에선 몰라도 될 일이
소설의 결구처럼 다발로 엮여져 나오고, 인터넷에서는 근거도 증거도
없는 맹랑한 소문이 괴물을 만들어 내곤 한다.
침묵, 때로는 무심 혹은 무관심으로 비쳐질 수 있으니 적절한 판단이
필요한 거긴 하나 간절히 구하려면 소리를 높이라 하지만,
침묵도 간절한 기도가 아닌가. 깊은 강물은 돌을 던져도 흐려지지 않는
법인데….
제가 할 일에 충실할 때, 반드시 무슨 소리가 필요한 게 아니다.
펠리컨이라는 새가 있다. 이 새는 특수한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위가 담을 수 있는 양의 물 3배나 더 담을 수 있다고 한다.
펠리컨의 주머니는 먹이를 잡을 때 사용할 뿐 아니라,
새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도 사용한다. 북극지방에 싸라기만한 햇빛이
잠깐 비치는 몇 시간 동안 먹이를 이 주머니에 저장한 후,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추운 겨울에는 새끼들에게 저장한 먹이를 나눠 줘
겨울을 나게 한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나기 전에 먹이가 떨어지면 펠리컨은 자기의
가슴살을 발기발기 찢어 가며 새끼들을 먹인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들에게는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넣어
준다. 숭고한 모정이다.
어미는 자신이 죽어 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외마디 소리도 없다.
펠리컨의 새끼 사랑은, 자신의 품 안에 수많은 식생을 끌어안되 좀처럼
흐릴 줄 모르는 깊은 강물 같지 않은가.
서양인들은 그래서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