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보 김길웅 시인

작은 행복들

by 동파 2021. 5. 28.
728x90

작은 행복들

 

김길웅. 칼럼니스트

 

한라산은 산이면서 제주섬이다.
천년을 산으로 앉았지만, 오늘 아침은 좀 별스럽다.
언제 한 점 구름까지 쓸어냈는지 흔치 않던 표정이다.
절정에서 양 어깻죽지로 흘러내린 선 따라 꿈틀꿈틀 산의 능선이 불쑥거린다.
잔설을 말끔히 슬어냈으니 겨우내 지고 있던 짐을 부려놓아 홀가분한가.
상큼하게 웃고 있다. 이런 날이면 무겁고 어둡던 우울의 옷을 벗어 던지며
나도 괜히 행복하다.

난은 무심하지 않았다. 무엇이 고물거리는 것 같았지만 기연가미연가했는데
비죽이 내밀었다. 영락없는 꽃대다. 스무 해를 기다렸더니 이제 보여주려는가.
물주고 솜으로 닦아 주고 바람 골라 들이고 밤엔 달빛도 홀리고….
허구한 날 숨죽여 다가앉았더니 마음을 앞세우는구나.
며칠 뒤 흠흠 맡을 네 배냇내 황홀하겠다.
행복은 아주 가까운 데 있었다.

끙끙대며 시 한 편 썼다고 히죽거리다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본다.
가쁜 숨결에 여운으로 벌겋게 아직도 상기 띤 걸 보니 밤새워
가며 한 판 가팔랐던 게로구나.
상이 오지 않아 멍때리고 앉아 초저녁서 자정을 넘겼더니,
예보 없던 한 줄금 비 지나는 소리에 눈 번쩍 띄었다.
만년필의 잉크 내림이 유창하더니, 13행 소품시가 내려 있다.
행복에 겨워 그만 새벽잠에 빠진다.

오래 피는 꽃, 내 반려 식물 1호 안시리움 분에서 새 꽃대 두 개가 솟아오른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에 아직 팽하게 옴츠린 샛빨간 불염포의 날렵한
맵시가 도드라지다. 겨우내 피었다 지더니 집에 와 첫 개화다.
네게 한 건 한 달 네 번 물시중이 고작인데 정에 무던히 고민했구나.
첫여름에 피면 겨울까지 갈 것이니, 꽃 없는 집에 넘치는 행복이다.

아파트 정원을 거니는데 아직 언 땅을 헤치며 벌레 한 마리 머리를 내밀었다.
얼마나 봄볕이 그리웠을까. 흙 알갱이랑 같이 미끄러지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기어이 기어 올라온다. 시종 지켜보다 내 몸도 간지러운지 콸콸 피 흐르는 소리
음계를 탄다. 미물도 옴짝거리는데 나라고 멈출 수 있나.
이맘때 인생 설계를 꼼꼼히 들여다봐야지.
행복 띄우는 추임새 얼쑤얼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있긴 한 건가.
간간이 다가오는 맑은 눈빛이 있다.
작품을 들어내 놓진 않으나 그냥 좋다 한다.
누구라고 밝혔든 얼굴을 숨겼든 그 목소리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저 소리를 들으려고 얼마나 악전고투해 왔는가. 이건 무슨 전리품하고도 다르다.
이럴 땐 탁 틘 바다로 달린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쉬지 않고 흥얼거리는 행복한 바다.

도심 아파트 숲에 오솔길이 있어 심심찮다.
5월 초에 거닐다 뜻밖의 꽃들과 조우했다. 누가 심었을까.
노란 수선화, 홍자란과 백자란 그리고 홍작약, 백작약. 가까운 자리에 시를 새긴 돌이
이쪽으로 머리 두고 앉았다.
김춘수의 〈꽃〉. 연전, 식물들이 풍성했던 내 옛집에도 없던 꽃들이다.
나무숲은 있되 꽃이 없어 목말랐는데 이젠 됐다.
반려가 있는 아파트는 행복이다.

꽃을 무더기로 내놓은 나무가 눈길을 붙든다.
몇 년 전, 한라생태숲에서 처음 본 나무다.
꽃 희끗희끗하더니 하얗게 번졌다.
5월에 눈이 내려 덮인 것 같은 놀라운 치장이다, 때죽나무.
“눈 좀 봐!” 소리 없이 이어지는 감흥의 눈빛.
연두색이 짙더니 눈처럼 하얀 속살을 드러내, 변용(變容)했다.
자장에 끌려들어 13층에서 내린다.
이 작은 행복.

'동보 김길웅 시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깊은 강물  (0) 2021.06.11
단순화  (0) 2021.06.05
스승의 날 선물  (0) 2021.05.21
씁쓸한 스승의 날  (0) 2021.05.14
해묵은 수첩  (0) 2021.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