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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 김길웅 시인314

까맣게 칠했다 까맣게 칠했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검정은 무채색이다. 심리적으로 편안함과 신비감을 주기도 하나, 무서움‧두려움‧암흑‧공포‧죽음의 색이다. 한자 ‘黑’은 불을 피워 창이 검게 된 것, 심히 그을렸다는 의미다. 검정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에게 간섭받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의사가 뚜렷하고 주위에 좌우되지 않는 강한 면을 지닌다. 부정적 측면으로 냉담함‧비탄‧소극성을 풍기며, 대체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심성이라 한다. 한 방송사에서 학대‧방임을 피해 집을 나온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다. 000에게 머릿속을 그려보라 했다. 자신의 머릿속을 모두 검정색으로 새까맣게 칠했다. “매를 맞았던 그때 그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어요.” 온통 검은색이었지만, 코와 입만은.. 2024. 2. 23.
장도리 장도리 김길웅, 칼럼니스트 장도리를 제주 방언으로 ‘못빼기’ 또는 ‘마치’라 한다. 목공들 사이엔 어떤지 몰라도 항간에서 장도리라고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못을 빼고 박는 목공구인데, 목공일은 못의 크고 길고 굵음에 따라 빼고 박기가 힘든 일이고 거칠다. 팔힘 좋은 남정네가 주로 목공일을 하며 쓰지 부녀자에겐 소용이 많이 닿지 않는다. 망치 한쪽 머리에 못뽑이가 있으면 장도리다. 손잡이와 머리 두 곳이 유용하게 쓰이며, 무게의 대부분이 머리 쪽에 치우쳐 있다. 기본적으로 한 손에 잡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쇠로 만든 몸통에 쇠 또는 나무로 된 자루를 박은 것이다. 한쪽은 원기둥 또는 사각기둥 꼴, 그 끝은 못을 박기 좋게 평평하게 돼 있으며, 다른 한쪽은 끝이 갈라져 노루발 모양을 하고 있다... 2024. 2. 16.
길의 시작, 그 탐색(5) 닫힌 그 골목길 길의 시작, 그 탐색(5) 닫힌 그 골목길 김길웅, 칼럼니스트 풍상을 겪느라 허둥거리며 인생길 여든의 능선을 넘어 내렸다. 많은 길들이 가팔랐다.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사느라 심신이 많이 지쳤다. 3년 전, 어간에 뇌의 노고가 컸던지 뇌혈관이 막히는 질환을 안았다. 간신히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아 위기는 넘겼으나, 아뿔싸 늘 병마를 안고 사는 포병객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차마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 의지로 이겨내려 안간힘을 써 버둥대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게 병인가. 이전보다 마음자리가 사뭇 어수선하고 정신이 어둡고 우울하다. 하다못해 찬연한 저녁놀을 스케치북에라도 데생해 노랗고 빨갛게 다발다발 색칠하려 했는데, 그렇게라도 인생을 마무리하려 단단히 기획했는데…. 해내려 .. 2024. 2. 2.
헌시(獻詩) 헌시(獻詩) 김길웅, 칼럼니스트 인연은 하늘을 흐르는 구름 같은 것, 비 갠 마당의 잔디 위로 내려앉는 햇살 같은 것이다. 바람을 타고 밀려와 섬의 새까만 현무암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물결 같은 것이다. 소리없이 피는 꽃이고 낙엽으로 져 흩어지는 가랑잎이다. 아침마다 다시 뜨는 해이고 하루를 가로 질러 칠흑의 밤으로 잠기는 시간의 긴 그림자다. 순환하기도 한다.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다. 가까이 살다 손흔들며 떠나간 이웃이고, 떠나더니 감감 무소식인 얼굴이고, 그리워 부르다 목마른 이름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은 소리내어 읊던 습작의 내 시이고, 내 마음을 속속들이 풀어놓은 채 지금도 흘러가는 절제되지 않은 한 편의 수필이다.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어떤 실체다. 내 것이면서 나나 당신이나 .. 2024. 1. 26.
빨리 달아오르면 빨리 식어 빨리 달아오르면 빨리 식어 김길웅, 칼럼니스트 여당의 젊은 비상대책위원장이 전국투어에 나섰다. 광폭 행보다. 국민의 이목이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젊은이다운 기백과 해박한 지식, 출중한 언변 그리고 대중적 아우라로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나라가 들썩인다. 혜성처럼 떠오른 그의 등단이 국민적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긍정적 시각에서 발길이 이르는 곳마다 그를 연호한다. 아이돌을 향해 오빠를 외치며 열광하는 광팬들 같은 장면이 이어져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물정에 어둡고 견문이 좁고 짧은 까닭에 모르지만 한 사람의 정치인에게 이렇게 환호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일 것이다. 나는 올해 여든셋에 이른 늙은이다. 침묵이 금이라는데 이 늘그막에 삼시 세끼 배불리 먹고 지내면 그만이지, 웬 .. 2024. 1. 19.
마음의 눈(心眼) 마음의 눈(心眼) 김길웅, 칼럼니스트 시력이 1.5, 2.0으로 정상이었다. 가족력이려니 했다. 노안이 시작된 건가. 50 문턱에서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그 때는 안경알이 돋보기를 깔고 있어 앞이 몹시 어지러워져 책을 볼 때면 돋보기로 바꿔 끼기도 했다. 과학기술은 안경이라고 멈춰 있지 않았다. 다중초점렌즈가 나오면서 눈앞이 차분해졌고, 덩달아 눈앞의 안개도 말끔히 걷혀갔다. 헌데 눈앞에 또 안개의 징후가 오락가락하는 게 아닌가. 기술이 따라주지 않아선가, 눈의 적응에 문제가 있는 건가 헷갈린다. 자칫하면 눈이 메말라 껄끄러우니 눈에 점안액을 넣어 촉촉이 적셔주며 다독거렸다. 짐작에 평소 눈을 혹사하는 것 같다. 책을 읽거나 타자를 하며 얼마나 부대끼는가. 눈곱이 끼고 늘 앞이 흐릿하다. 아침에 일어나.. 2024. 1. 12.
길의 시작, 그 탐색⑷ 수필의 길, 시의 길 길의 시작, 그 탐색⑷ 수필의 길, 시의 길 김길웅, 칼럼니스트 나는 쉰두 살 나던 해, 뒤늦게 수필의 길에 들어섰다. 문학을 향한 본격적인 행보였다. 1993년 제주문학상 신인상에 ‘그림 속의 집’이 당선됐고, 몇 달 뒤 이듬해에 ‘눈물의 연유’가 《수필과 비평》에서 신인상을 수상해 중앙 문단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올해가 수필로 등단해 30년이 되는 해로 나이 여든둘의 고비를 돌아 한 살 더 얹게 될 목전이다. 회고는 과거지향적이라서 그런지 하다보면 속절없이 지난날을 자꾸 오늘에 불러들이게 된다. 그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이. 그때는 수필로 등단한 이가 지역에 두, 셋에 지나지 않아 ‘제주일보’에서 신인 얼굴에다 등단지(표지)까지 사진으로 실어가며 축하해 주었던 일이 생생하다. 등단은 기쁨이 차오.. 2024. 1. 5.
또 한 해가 저문다 또 한 해가 저문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12월, 이 해의 마지막 달이다. 또 한 해가 저문다. 왜 그럴까. 한 해를 살면서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달력에 오늘따라 눈이 오래 머문다. 멍때린다. 여태껏 쌓아 온 시간의 잔해마저 가뭇없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을 뒤적여도 밖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이 스쳐간 흔적조차 없다. 어느새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까. 웬일인지 짧아진 하루가 끌고 내린 산 그림자기 유난히 길다. 새해를 맞는다며 들썩이던 기대와 환희의 순간들이 일 년이란 시간을 소진해 버린 언저리로 한 자락 찬바람이 들락거릴 뿐, 사위 적막하다. 나를 스쳐지난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루가 24시간이니 365일을 곱하면 산술적으로도 엄청나다. 그 시간을 무얼 한다고 알맹.. 2023. 12. 29.
시표구, 선물 받다 시표구, 선물 받다 제주일보 김길웅, 칼럼니스트 한 여류 한글서예가에게서 표구를 받았다. 정성스레 싸고 보낸 손길에 발신인을 확인하며 놀랐다. 서예전 참가 회원작품들을 수록한 도록이 들돌의 무게같이 묵직해, 보낸 작품을 열어 보기도 전에 창작의 열기로 화끈했다. 보낸 이는 아내의 초‧중학교 동창으로 학교장(인화초)을 지낸 김태희 선생의 사모님 고순랑 여사였다. 김 교장과는 교직에 있으면서 공사로 자주 만나 친교해 온 허물없는 사이지만 실토하건대, 고 여사님과는 기회가 닿지 않아 썩 임의롭지 않다. 선물을 앞에 놓고 면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표구는 족자, 곧 현폭(懸幅)인데, 폭이 넉넉하고 길이 또한 길어(35×120cm) 한눈에 품격이 느껴졌다.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이 주최한 22회 ‘한글문화큰잔치.. 2023. 12. 16.
눈(雪) 눈(雪) 동보 김길웅 눈이 내려 천지가 하얗다 이것저것 이쪽저쪽 일색으로 도배한 세상 하늘이 거울을 기다려 맘먹고 기획했나 많다 적다 옳다 그르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갑이다 을이다 밟다 어둡다 너는 내편 나는네편 꼬리 잡아 늘어지며 말 많은 세상에 대놓고 내리는 경고장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 새하얀 무채색이 밝은 거대화 화폭 강아지가 꼬리 치는 이유를 이제 나도 알겠네 2023.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