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김길웅, 칼럼니스트
⑴…텃밭에 씨 고구마 심어 두둑 북돋우고,
해 묵힌 오줌 퍼다 뿌려주면 유월엔 한세상으로 우거졌다,
두 마장 걸어 내 눈대중에 가을운동회 날 달리기 50m 길이쯤 돼
보이던 사래 긴 밭을, 쟁기로 갈아엎으면 이랑을 내어 흙에 두엄
고루 섞어 밑거름을 깔았다. 어머니와 누나가 도막 낸 줄기를 등에
지고 날라, 밭에다 담상담상 꽂아가며 흙을 덮씌웠다.
때맞춰 비가 오신다. 대지를 적시는 젖줄 같은 단비다.
한여름 불볕 맞은 호박잎보다 더 늘어졌던 가녀린 것들이 장맛비에
파랗게 살아났다. 우리 어머니 함박웃음 터트렸던 연유를 한참
후에야 알았다.
⑵…문명을 능가하는 것이 있었다. 가난 속에 흙이 키워 내는 놀라운
생명성, 마침 우기라서 한철을 비가 넉넉히 내리면 그 빗물 받아먹으며
줄기가 뻗었다.
불과 달포, 척박한 땅이 푸른 신화를 키우면서 내리는 비에 줄기는
더욱 기세등등해진다. 석 달, 넉 달, 어느새 고구마밭은 남실대는 창창한
대천바다. 푸른 기운이 밭담 너머로 낭창낭창 넘쳤다.
⑶…배고파 속 쓰리다고 무두질하랴. 그게 아니면 암탉의 뱃속에 손을
우비어서 되다 만 알을 꺼낼 순 없다.
산을 들어다 눈앞에 앉힌다 해도 쉬엄쉬엄 추석이라는 분수령은 넘어야
했다. 추석 쇠고 보름쯤 뒤, 밭일 끝내고 돌아오던 어머니 흙 묻은 까만
얼굴이 허옇게 웃으면 어둠 속에 집 어귀가 다 환했다.
“고구마 팔 날이 다 됐나 보더라, 몇 개 파고 와 봤다. 삶아서 먹자꾸나.”
불콰해진 왜감 낯빛보다 붉게 마음 달뜨던 소년의 ‘흠흠흠’ 숨 가쁜 콧김 뒤,
김 모락모락 나는 햇고구마에 곯은 배가 놀라 뒤척였다.
⑷…가을이다. 고구마 파던 날은 어린 나도 밭에 갔다.
어머니와 누나가 이랑 따라 호미로 고구마를 파내면, 나는 멱서리에 담기
좋게 모도록모도록 모았다.
고구마는 천차만별, 팔뚝만한 것에서 열 살 내 고추만한 놈도 있어 웃음이
났다. 내 눈엔 밭이 학교 운동장만 했는데, 파낸 건 위아래로 실어 고작 한
마차. 집에 부린 고구마는 텃밭에다 내 키 두 배로 깊이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고구마는 다섯 식구의 겨울 양식이었다. 솥에 고구마를 넣어 눈 밝은 닭 주워
먹음직하게 좁쌀 섞어 밥 해 먹거나 고구마 삶고 두레상 받아 앉아,
등에 붙은 배를 달랬다.
나는 좁쌀을 섞는 거북한 혼합보다 고구마의 그 순수가 좋았다.
왜솥에서 삶은 고구마를 꺼낼 때 얼굴 확 끼얹던 훈김, 훈김이 흩던 고구마
냄새에 휘청하던 소년. 그날의 고구마 맛은 꿀맛이었다.
⑸…겨울이다. 어릴 적 겨울은 연년이 대설이었다. 며칠째 펑펑 눈이 내려
정강이를 묻던 긴긴 겨울밤, 눈은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잠은 어디론가
숨었다. 눈 속을 헤치고 텃밭에 간 아버지가 팔을 어깻죽지까지 구덩이
속으로 디밀어 고구마를 꺼내 오셨다.
외풍에 펄럭이는 등잔의 파란 불빛 아래, 날 빛 흰 낫으로 차가운 것
몇 놈의 껍질을 쓱싹쓱싹 벗기며 식구들에게 나눴다.
허기진 배에 잠이 안 와 침 삼키며 벽을 돌아눕던 겨울밤의 그 야참의 맛,
과실보다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