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남쪽 고성 연화산 옥천사로 오르는 산길, 유월의 녹음이 짙게 깔려 있다. 나무터널 사이에서 산새들이 순례자들을 반기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금강경』 몇 줄처럼 귓가에 와 닿는다.
무성화(無性花)의 불두화가 핀 돌층계를 지나 대웅전을 올라서니 문득, 은사이셨던 청담 스님의 진영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종연생(從緣生) 종연멸(從緣滅), 인연 따라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해 우주질서와 생사와 열반이 지난밤 꿈결 같다’는 스님의 경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은 회억(回憶)때문일까? 태어남과 사라짐이 인연인 것처럼 내가 ‘108산사순례기도회’를 이끌고 이곳 연화산 옥천사에 머물게 된 것도 은사 스님과의 끊을 수 없는 인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옥천사의 유래는 깊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창건되어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번성했었으나 화재와 중창을 거듭하다가 조선 후기 큰 중창이 이루어져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당시 옥천사는 상주하던 사람만 340명에 이르고 물레방아만 12개가 돌아가던 거찰이었다. 현재도 옥천사는 중심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자방루, 적묵당, 심검당, 팔상전, 나한전 등의 당당한 당우를 거느린 천년 고찰이다. 경내에는 사시사철 샘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수량과 수온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샘이 있으며, 이 샘에서 나오는 약수를 장기간 마시면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 이 샘으로 인하여 옥천사(玉泉寺)로 불린다.
누구에게나 출가의 길은 험난하다. 청담 스님은 이곳에서 출가의 첫발을 내딛었다. 승(僧)에게 있어 출가는 곧 새로운 탄생이요, 고행길이다. 은사 스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은사 스님이 출가하신 옥천사에 산사 순례 기도회를 이끌고 온 감회는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아마 스님은 이곳에서 그토록 애지중지 하셨던 그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순례 회원들은 범종들을 한 번씩 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종소리는 연화산의 산자락을 울리고 나뭇잎을 흔들고 산열매를 떨어뜨리다가 마침내 내안을 고요 속으로 이끌었다. 불가에서의 종소리는 삼독을 멸하고, 생로병사가 단절되어 마침내 초월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 은사 스님 역시 이 깊은 산골짜기인 옥천사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님은 내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정화불사’와 ‘중생구제’의 두 길만을 나섰다. 스님이 그러한 마음을 가졌던 곳이 바로 고성 옥천사인 것이다. 오늘 따라 법정 스님이 은사 스님의 열반에 바치는 곡함이 떠오른다.
“스님! 마음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 뜻을 알면서도 빈 공간이 마른 바람소리처럼 들립니다. 부재중, 그것은 비단 스님의 방 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불교 자체가 때로는 부재중입니다. 부재의 표제를 떼버리고 한결같이 골몰하시던 스님은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비탄이 아니라 그 뜻을 받들어 화합정진 하는 일입니다. 스님과 함께 우리가 죽지 않으려면 그 길 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스님은 ‘성불을 한 생 늦추어서라도 정화불사를 해야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효봉, 동산, 금오 스님과 함께 오늘날 한국불교의 조계종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가시고 우리 곁에 없으시다. 아니 정화불사의 화신으로 우리들 곁에 남아 계신다.
은사 스님이 적멸에 드신지 무려 38년 6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은사 스님을 모셨던 마지막 시자였던 나는 스님께서 출가의 발길을 내디딘 옥천사에 5천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사찰에 서린 청담 스님의 유훈의 흔적들을 더듬고 있다. ‘육신은 집과 같아 집이 낡으면 허물고 새로운 집을 찾듯 스님은 어디에 집을 마련하셨습니까?’라는 애도사처럼 스님은 이 옥천사 어디쯤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청담스님의 사리탑 앞에서 염주보시를 하는 순간 일심광명 무지개가 서쪽하늘에 찬란하게 떴다. 그 순간 나와 회원들은 환희심에 차올랐다. 참으로 감회 깊은 옥천사 순례였다.
선묵 혜자 스님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도선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