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암 순례 마지막 날 오후, 한려해상수도에서 일심광명 무지개가 찬란하게 떴다. 일주일의 대웅전 복원기도법회를 마친 나는 피곤함도 잊은 채 회원들과 더불어 그 광경을 바라보고 난 뒤, 서울로 돌아오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순례 기간 중 하늘에 뜨는 무지개는 부처님과 나의 은사 스님이 내게 내려주시는 하나의 공덕임을 나는 안다. 믿음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차라리 산사순례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벌써 3년이 훨씬 지나고 사계(四季)가 여섯 번이 지나가야 비로소 그 회향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겠지만, 한 달 한 달, 순례를 마치는 날마다 나는 큰 기쁨을 느낀다.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또 다시 순례를 준비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길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있고 그러므로 그 길은 영원하다. 완성이란 없다. 완성이란 죽음뿐이다. 죽음도 다만 탈바꿈에 지나지 않는다.’
청담 스님께서 평생에 자주 말씀하셨던 어록(語錄)이다. 인생은 하나의 길이다. 하지만 그 인생의 길은 언제나 앞에 놓여 있으며 완성이란 없다. 어쩌면 ‘108산사 순례’를 회향하더라도 그 순간부터 나는 또 다시 먼 길을 떠날지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나야 그 길이 비로소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속세를 떠나 45년 동안 부처님의 제자로서 살아오면서 생활신조로 삼은 신념이 있다. 나를 믿고 찾아오는 불자나 신도들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 분들 중 설령, 아직 신심이 깃들지 않은 사람이 있거나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들이 나를 찾아왔을 때는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대했다.
아마, 이런 과정들이 오늘날 산사순례 기도회가 활성화된 이유일 것이다. 오늘, 내 앞에 마주하는 이가 오늘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사람임을 생각하며, 이들에게 어려운 일이나 불행이 닥치면 기꺼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불교의 진정한 포교가 아니겠는가.
불교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다. 108산사순례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억겁의 인연으로 만났기 때문에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분들이다. 뿐만 아니라 산사 순례를 함께 떠나는 회원들 또한 지대한 인연으로 만난 분들이시기에 서로 의지하며 힘을 얻고 있다. 그 와중에 하늘에 뜨는 일심광명 무지개조차도 모두 인연의 결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무지개는 분명히 내가 세웠던 서원에 대해 부처님과 청담 스님께서 내려주신 하나의 가피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괴로움의 세상이지만, 우리가 세운 서원으로 인해 극락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작은 공덕하나가 세상의 아름다운 씨앗이 되어 병든 사람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수만 있다면 날마다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성북 법등의 한 보살님은 어머니의 치매로 인해 무척이나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 보살님은 매일 어머니 곁에 있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때문에 하루가 지옥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108산사 순례를 만난 이후 어머니를 도선사에서 운영하는 혜명복지원치매센터에 요양을 시키고 난 뒤, 행복을 찾았다고 한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보채는 어머니를 곁에서 간호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 씩 찾아가는 그녀는 병석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108산사 순례를 다니며 지극정성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하고 서원을 하고 난 뒤부터 어머니의 병환 상태가 매우 좋아졌다고 한다. 만약, 자신이 산사 순례를 다니지 않았다면 치매 센터를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법등장(法燈長)까지 맡을 정도로 매우 열심인 그 보살을 볼 때마다 나는 흐뭇함을 느낀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인연으로 맺어지고 있다.
선묵 혜자 스님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도선사 주지
1044호 [2010년 04월 13일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