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길을 지나다가 도심의 어느 치과 건물위에 ‘힘내세요. 일본!’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고 잠시 묵상(黙想)에 빠졌다가 마음이 미어지듯 아파왔다.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생사를 알 수 없는 대참사를 겪은 그들에게 한국인이 던지는 이 메시지에는 따뜻한 정이 담겨져 있었다. 한국에게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의 이미지가 더 강했던 일본,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당한 시련 앞에 한국인들의 마음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오늘 ‘108산사순례이야기’를 접어두고 일본인과 일본의 대재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심지어 숱한 죽음 앞에서도 오히려 산자들을 더 걱정하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 적지 않게 놀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재앙의 극한 앞에서도 이토록 침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은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파된 이래, 지금까지 부처님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대표적인 불교국가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의 법을 몸에 익인 채로 오랜 세월동안 불교적 삶을 이어 왔다.
일본인 학자는 이를 두고 “일본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몸을 자연에 순응(順應)하며 살아온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그 또한 불교적 삶의 태도이다. 그 한 예를 보자.
한 호텔이 정전으로 인해 음식을 제공할 수 없어 우동 10그릇을 가져왔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우동을 뒤로 돌려 양보를 했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굶어 죽을 극한상황 앞에서도 밥이 든 그릇이 있는 데도 그 욕망을 참고 밥그릇을 뒤로 돌리는 행위는 불교의 수행자들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럼, 일본인 모두가 수행자들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들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의 행동은 지극히 순리적이면서 단순했다. 그런데 그 작은 행동이 전 세계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셨던 말씀 중의 가장 중요한 하나는 ‘남을 위해 자비를 베풀고,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말라’이다. 이 보다 위대한 가르침은 더 이상 없다. 일본인들은 그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지금도 ‘남에게 절대 폐(메이와쿠)를 끼치지 않는 교육’을 어린 시절부터 받게 한다. 또한 남을 돕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으며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킬 줄 안다. 이것이 곧 부처님의 자비사상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정신적 토대를 오랜 시절부터 불교성지 순례를 통해 키워왔다. 성지 순례는 홍법대사(弘法大師)가 시작한 후 1,2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그들이 성지 순례에서 배우고 익힌 것은 바로 부처님사상이다. 때문에 대재앙이 스쳐간 뒤 남편과 아내, 아이와 부모가 죽었는데도 슬픔을 그저 안으로만 삼킬 뿐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죽음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타인을 걱정한다. 이 또한 불교정신의 영향이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사후(死後)세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죽으며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에 있을 뿐, 생사가 둘이 아닌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 또한 불교의 내세관이다. 이처럼 관습은 매우 무섭다. 일본인들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놀라운 자비정신과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생활 속에 흡입된 부처님의 법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참을 줄 알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법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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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묵 혜자 스님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도선사 주지
***법보신문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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