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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과 유마경(維摩經)

유마경(維摩經) 제4 보살품~김해 정암사 법상 스님(7월18일)

by 동파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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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6년 7월 18일 월요일
유마거사와 광엄동자

김해 정암사 법상 스님과 
유마경(維摩經) 제4 보살품 공부하기

師子吼是道場 無所畏故
사자후시도량 무소외고

사자후가 도량이니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해 정암사 법상 스님 강해]  
사자(師子)는 뭇짐승들의 왕인 사자처럼 모든 사람 가운데 왕이라는 표현으로 부처님의 지위가 
그러하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사자후(師子吼)라 하고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 위하여 앉으신 모든 자리를 사자좌(師子座)라고 한다. 참고로 문헌에
 따라서는 사자후(獅子吼). 사자좌(獅子座)라고 하므로 이 두 가지 표현으로 쓰인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사자(師子)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사자후(師子吼)는 사자가 포효하면 뭇짐승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그 어떠한 외도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기에 그들에게도 법을 설하여 불교로 귀의케 하셨다. 

본문에서는 무소무외(無所無畏)라고 하여 어디를 가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경전 첫머리에 보면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아난이 이처럼 들었다고 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여시아문은 삿됨 가르침을 깨트려버리고 정법을 들어 내세우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뜻이다. 까닭에 경전의 첫머리부터 사자후를 하시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이 세 가지를 소중하게 여겨 
불(佛). 법(法). 승(僧) 삼보라고 하여 모든 불자는 받들어 숭상한다.

불 佛(Buddha)
불(佛)은 오로지 석가모니불을 말함이지 그 나머지 불보살은 방편불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불은 본불(本佛)이고 그 나머지는 적불(迹佛)이다. 
본(本)과 적(迹)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발이 본(本)이고 신발 자국은 적(迹)이다. 
하늘의 달이 본(本)이고 물에 비친 달은 적(迹)이다. 

법 法 (dhamma)
법(法)은 정법을 말함이지 그 나머지 모든 가르침은 정(正)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임시로 
설정된 것이지 진짜는 아니다. 정(正)을 다르게 표현하면 실(實)이라고 하며 방편을 
권(權)이라고 한다. 까닭에 실교(實敎)를 알아차려야지 권교(權敎)에 빠지면 안 된다. 
경전의 흐름을 체(體)와 용(用)으로 나타낸다. 체(體)는 부처님께서 하고자 하는
 본래 목적을 말함이고 용(用)은 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비유나 문사(文詞)를 말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법화경의 체(體)는 일승(一乘)을 말함이며, 
이를 설명하고자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은 모두 방편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 알아차리면 법화경은 오직 일불승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믿으라는 
것이지 관세음보살을 믿으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 
환술로 만들어진 화성(化城)이 진짜 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장경은 위경이다. 위경은 당연히 체(體)도 없고 체(體)를 뒷받침하는 
용(用)이 없다.
 
 승 僧 (Sangha)
승(僧)의 사명과 임무는 부처님 말씀을 널리 전하는 전법이다. 
전법은 법을 수레바퀴에 비유하여 법륜(法輪)이라고 그물에 비유하면 포교(布敎)다. 
따라서 법을 전하지 아니하고 깊은 산중에 혼자 사는 나 홀로 스님은 필요하지 않으며 
수행을 위하여 잠시 필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기 때문이다. 

절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부처님 법을 전해야 한다. 전법이 없는 모든 의례나 행사. 
재(齋). 봉사. 보시(布施) 따위는 헛수고다. 자신이 다니는 절에 법문은 없고 염불이나 
축원만 있다면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신 전하기에 
스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 사자후가 실종되었는지가 관습처럼 되어서 겉은 성대하고 웅장하게 보여도 
그 안은 허약하기가 짝이 없다. 다시 말하면 법이 살쪄야 하는데 법은 빼빼 마른 
나뭇가지처럼 겨우 잎 서너 개로 연명할 뿐이지만 건물은 살이 쪄서 짓고 또 짓고 
공사가 끝이 없다. 텅 빈 유교의 향교나 재실처럼 불교가 변한다면 이를 구경하는 
구경꾼만 있을 뿐이다.

또한 사자후가 실종되면 믿음의 주체가 흔들거려서 숱한 불상을 봉안한다.
 예를 들어 대웅전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만 모셔야 대웅전이다. 
순천 선암사 대웅전 등이 좋은 본보기다. 또한 사자후가 실종되면 불상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불상은 없는 뱀의 다리를 그리는 사족(蛇足)일 뿐이다. 

또한 법이 실종되면 사문이면서도 시집발표 사진전. 그림을 그리거나. 
이곳저곳 노래를 부르러 다니거나, 무슨 박사 등이 되었다고 하지만 사문은 세속의 
것을 멀리해야 사문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다 사자후를 할 수가 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부처님 법을 전하는 것이 곧 사자후다.

경남 김해시 한림면 시산리 270
정암사 법상 합장 


※ 이 법문을 널리 전하시길 바랍니다. 
법문을 받아 보시고 여러분들의 지혜가 날로 늘어나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도구로 전락될 뿐입니다. 
오늘도 10명 이상에게 이 법문을 전하시는 것이 곧 전법에 동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