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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과 유마경(維摩經)

유마경(維摩經) 제4 보살품~김해 정암사 법상 스님

by 동파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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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거사의 고향 (2018년2월 방문)

 

 

2022년7월13일

유마거사와 광엄동자

김해 정암사 법상 스님과 
유마경(維摩經) 제4 보살품 공부하기

중생이 도량이니, 중생이 무아(無我)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김해 정암사 법상 스님 강해]  
중생이라는 용어는 불교의 기본 용어의 하나로 모든 경전에 등장할 정도로 그 빈도가 
아주 높은 단어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표현만 쓸 뿐이지 중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이는 의외로 적다. 그만큼 불교는 교리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중생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를 뜻하며 이를 달리 표현하여 유정(有情). 함식(含識), 
함령(含靈), 함생(含生). 함정(含情), 군생(群生) 이라고도 한다. 불교는 같은 뜻이라도 
그 표현을 달리하는 게 너무나 많다. 이는 한자라는 독특한 문화를 쓰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그러하다. 그러나 뜻하는 바는 하나지만 용어가 수두룩하게 많은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참고로 역경승(譯經僧)이었던 현장(玄?)은 유정(有情)으로 한역하였다. 

중생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포함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로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 등도 포함한다. 이 순서 가운데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는 오악취(五惡趣) 중생이라고 한다. 또한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는 
식물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까닭에 마음을 가진 모든 것이 중생이다. 

불교가 다른 종교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들의 인식을 존중해 준다는 것이다. 지옥[귀신] 중생, 아귀 중생, 축생 중생, 아수라 중생, 
인간 중생 등도 모두 구제의 대상이기에 중생제도(衆生濟度)는 불교의 슬로건이다. 

어떤 경전에도 귀신을 물리친다는 경은 없다. 만약 이러한 경전이 있다고 하면 보나 마나 위경이다.
 따라서 귀신을 배척하고 원수처럼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몰지각하면 귀신을 물리친다고 
소금, 부적, 가시나무, 코뚜레, 작두 등을 이용하지만 이는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고 하는 미개한 
행위다. 이들은 경도 부적이고, 진언도 부적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무리다. 

중생을 굳이 우리말로 바꾸면 ‘뭇 생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뭇 생명에게 대자(大慈)를
 베푸시고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시므로 부처님은 뭇 중생을 사랑으로 맞이하시는 거룩한 분이시다.

중생이라는 표현은 유가의 서적인 예기(禮記)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참고삼아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기 제의(祭義)편에 보면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러 귀(鬼)라 한다. 
인간의 뼈와 살은 땅속에서 썩어 흙이 된다. 그런데 그 기(氣)는 하늘에 올라 밝게 빛난다. 
쑥을 태워 냄새를 피워 올리면 사람들이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되니 이것은 온갖 사물의 정(情)이며, 
신(神)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 焄蒿悽愴 
此百物之精也 神之著也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마치 아픈 이가 없으면 의사가 필요 없음과 같고 비 내리지 않으면 
우산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중생을 제도하는 산실(産室)인 사원은 세속을 멀리하고 산속으로 
들어간다면 중생하고는 그만큼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중생이 곧 도량이다.

중생 다시 말해서 사람 개개인이 부처의 성품이 있음을 안다면 무아(無我)를 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상(我相)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알면 태평한데 모르면 나를 내세워 상(相)을 짓는 법이다. 
마치 초파리 눈동자에 나를 세워 내 땅이다. 너 땅이다 하는 것처럼 가소로운 삶으로 얼룩지는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에서 조탁(鳥琢)의 비유에 보면
암탉이 여러 개의 알을 부화하고자 온기를 주어 품고 있으면 그 암탉이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깨고 나와야 할 텐데, 라고 바라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은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고 하였다.

이렇듯 중생도 부처님의 가피를 받으면 삼계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중생은 늘 탐욕심을 
앞세워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기에 늘 중생심으로 살아가고자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노력한다. 부처 되려고 하는 마음은 쏙 빼버리고, 말이다.

노자(老子)는 말했다.
企者不立 跨者不行
기자불립 과자불행  
발 뒤꿈치를 들고 서는 자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겅중겅중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가 없다.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자견자불명 자시자불창 자벌자무공 자긍자불장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其在道也 曰 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기재도야 왈 여식췌행 물혹오지 고유도자불처
 그것을 도에 있어서 먹다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고 한다. 
만물은 대체로 그런 것을 싫어한다. 
고로 도가 있는 자는 그렇게 처신하지 않는다. 

노자는 중생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남보다 잘나 보이려고 억지심을 가진 자는 마치 발뒤꿈치를 들고 있음이요. 
가랑이 쩍쩍 벌리고 걷는 자다. 그러나 금방 들키고 만다.

자기 자랑을 별로 먹을 것도 없는 한정식 반찬처럼 즐비하게 늘어놓더라도 상대는 이미 이를 
알아차리고 있어도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다. 제 자랑하지 마라. 
우리 속담에 자랑 끝에 불붙는다고 하였다.

먹다 남은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다 남은 것은 시궁창으로 가거나 돼지 구유로 갈 뿐이다. 
군더더기 같은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제아무리 까불어 봐야 볼썽사나울 뿐이다.

분 바르지 아니하여도 부처님 마음을 쓰면 그 모습이 평온(平穩)하여서 입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얼굴로 말을 하는 법이다. 팔뚝 근육을 굳이 안 보여 주더라도 남들이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법이다.

중생연습 그만하고 제발 부처 연습 좀 해보자. 

경남 김해시 한림면 시산리 270
정암사 법상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