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솟은 창림사의 석탑만 보인다.
이곳을 찾아 방문을 하기위하여 신라문화원(원장 짐병길)을 방문했고,
최민희 본원 부설연구소장님의 안내로 2013년4월6일 비가오고 바람이 부는날
창림사터를 찾았다.
2011년 5월 발굴을 시작했다는 안내판으로 보아 동안 소나무 숲으로 쌓여있었다.
창림사는 남산에 있는 많은 절터 가운데 이름이 뚜렷할 뿐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 있어 유명한 곳이다.
많은 주춧돌들이 흩어져 있고,오랜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된 사지를 보노라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내 나의 탓일까? 세월의 무상함인가?이래서 제행무상이라했던가...
열심히 비를 맞으면서 설명을 해주시는 최민희 소장님!
존경스럽다.
화학이 전공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부처님 법을 잘 설명하여 주신다.
부처님 법을 전달하라는 포교사로서 내가 가는 이 길이 부끄럽다.
창림사지는...삼국유사에 기록에 의하면 이곳이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세월 탓인지 궁궐지로 여길 수 있는 유물의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창림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까지 있다가 조선 초기에 폐사되고 탑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탑안에서 발견된‘창림사 무구정탑원기’ 때문에 이 탑이 신라 문성왕 (855)때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기 저기 이러한 주춧돌만 있습니다.
<창림사터에 남아있는 유명한 쌍두 귀부>
모가 죽은 사각대석위에 두 마리의 거북이가 큰 비석을 등에 얹고 고개를 치켜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거북이의 크기는 한마리의 넓이가 86.3cm
길이가 142.5cm,높이가 38.5cm이다
이 귀부에 있던 비는 지금 없어졌습니다.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金生, 711~791년)이 쓴 비였다고 합니다.
원나라 때의 조맹부가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 이 비에 대해
쓴 글이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 경주부에 있습니다.
이것은 당나라 시대 신라 중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로,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훨씬
나을 수는 없다.
이 귀부는 모서리 모를 죽인 네모꼴의 지대석 위에 거북 두 마리가 나란히 있습니다.
흔히 보는 귀부가 아닙니다. 쌍귀부입니다. 오른쪽 귀부는 이제 막 앞으로 나가려는
듯 앞발 가운데 한 발은 땅을 딛고, 다른 발은 뒤로 한껏 젖혔습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부순 듯 귀부의 머리는 떨어져 나가 없고, 남아 있는 목에는
비늘이 새겨져 있습니다. 살이 통통 오른 동글동글한 앞발과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거북의 모습이 귀엽습니다.
쌍두 귀부에 대하여 역사와 배경과 경주의 신라문화에 대하여
열변을 하시는 최민희 소장님을 다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탑돌이를 했습니다.
석탑 아래에는 팔부신중상을 조각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팔부신중상이고
나머지는 유실되었습니다.
건달바,마후라가,아수라
사면에는 쌍바라지문을 조각하고 중앙에 문고리를 새겨놓았다
<석탑 앞에 이름 모를 무덤...>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한때 신라왕실의 도움을 받아 번성했을
창림사의 모습은 지금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불국토를 이룬 신라의 문화를 생각하면서
절터에 서서
석탑에서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폐허가 되고,흩어진 주춧돌에서
깨어진 귀부에서
이름 모를 무덤을 바라보면서
홀로 우뚝 서있는 천년의 세월속에
석탑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
석탑에 서서
이은상 시"옛동산에 올라"를 허밍합니다. 동파는...
<남산 불적 답사 최민희 소장님의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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