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불사리탑사 주소 : 제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268-1번지
TEL: 064-782-9110.064-783-8801
평화통일 불사리탑사 일주문
평화통일불사리탑사는 제주에 유배되어 입적한 조선시대 허응(虛應) 보우(普雨, 1509~1565)
스님과 환성(喚醒) 지안(志安, 1664~1729) 스님, 그리고 중국의 정법 대사(正法大師) 등의
순교비를 세워 전법 정신을 잇고, 일제강점기와 제주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영령들을 위로하며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원력으로 창건되었다.
1980년대 중반 고관사(古觀寺)의 중창 불사 도중 아미타불 복장에서 진신 사리가 나오자 당시
주지였던 도림 스님이 원을 세워 1998년 8월 평화통일불사리탑사를 완공하였다
평화통일불사리탑사에는 3층으로 된 불사리탑과 요사, 보우대사와 지안 스님의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내부에는 법당, 약사전, 설법전, 선방, 사경실, 문화원 등이 갖추어져 있다.
특히 1층 법당에는 약사여래불, 2층 법당에는 석가모니불, 3층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삼십삼천의 연화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형상화 해 놓았다.
불사리탑 곳곳에는 창건 당시의 원력들을 모아 갖가지 상징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우선 일주문은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인 평화 통일을 기원하며 북쪽의 백두산 천지를 향하도록 설계하였다.
불사리탑은 1층 1,205㎡, 2층 924㎡, 3층 356㎡ 규모이며 총 높이 33m의 구조물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 구조 자체가 특별한 갖가지 서원을 형상화한 것이다. 평수로 환산했을 때 1층 365평의 불사리탑 원형 바닥은
우주의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의미한다. 2층과 3층은 각각 280평과 108평으로 280수와 108번뇌를 상징한다.
불사리탑의 외양이 사리탑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사리의 원력으로
세워진 사찰임을 나타낸다. 전체 높이가 33m로 조성된 것은 우주 삼십삼천 모든 생명의 청정한
성불을 발원하기 위한 것이다.
불사리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의 특징이 곳곳에 접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사리탑 난간은 신라 황룡사 9층탑을 형상화하여 이곳을 찾는 신도들이 탑돌이를 하며
기도 정진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다.
평화통일불사리탑사의 법화경 사경탑(寫經塔)에는 5만 권의 사경(寫經)이 봉안되어 있어 사경 수행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다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장보살 사경탑, 관세음보살 사경탑,
평화통일의 종 사경탑 등 도량의 모든 탑에 사경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평화통일불사리탑사에는
보우사상연구원이 활동 중에 있다.
세계평화의 종
허응당 보우스님 순교비
허응당 보우대사 (虛應堂 普雨大師. ?~1565)
『조선시대 스님으로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15세 때 삭발. 1548년 명종(明宗)의 모후 문정왕후의 천거로
봉은사(奉恩寺)주지로 부임하여 불교 중흥의 대역사를 시작하셨다.
봉은사를 선종(禪宗) 총본사로, 봉선사를 교종(敎宗) 총본사로
정하여 고려시대 승과를 다시 부활시켜 서산, 사명, 영규와 같은 인물을 발굴했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주어 지위를 향상시켰다.
18년 동안 모진 모함과 억압속에서도 피눈물을 흘리며 신명을 바쳐 중흥불사를
이룩하셨다.
문정왕후가 서거한 뒤 조정유신(儒臣)들의 참소로 제주도 조천땅 연북정에 귀양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의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심으로 험난한 한 시대를 제도하시고
열반에드셨다.
억불의 시대 조선 중기에 불교중흥을 위해 애쓰시다가 끝내 순교하신 보우대사는
한국불교사에 영원히 꺼질수 없는 진리의 횃불이시다.
한 몸을 던져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 오늘이 있도록
하신 육신보살이시다.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불자는 보우대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불국정토를 건설하자.
주지 석도림 합장』
허응당 보우스님과 환성당 지안대사 순교비
환성(喚醒) 지안대사(志安大師 1664~1729)
『조선시대의 스님으로 호는 환성(喚醒), 15세에 경기도 미지산 용문사(龍文寺)에서 삭발.
17세에 월당설재의 법을 잇다. 27세에 직지사 모운대사의 법을 이어 종풍을 드날렸다.
지안대사의 설법이 너무나 깊고 묘하였으며 평소 신령스럽고 기적적인 일들이 많아 스님이
계신 곳은 많은 대중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슬프다. 말법세상이여, 도가 천길이면 마가 만길이라 하던가.
조정의 유생이 놀라고 긴장하여 지리산 토굴에서 참선수행중에 계신 스님을 체포하여
호남 감옥에 5년 동안을 가두었다. 무죄가 판정되었음에도 끝내 유죄를 만들어
제주도 조천 연북정으로 유배시켰다.
영조 5년 7월 1일 도착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가 7월 7석 오후에 순교하시니
3일동안 한라산이 울고 바다물이 들끓었으며 영결식 하던 날 하늘에 무지개가 서고
서기가 빛을 내니 세인들은 "성자의 입적" 이라 하였다.
세수 66세이시고 승납 51세였다.
지금 한국불교의 법맥과 계맥은 모두 환성 지안대사의 맥이다.
1994년 7월 7석날 순교비를 세우니 무지개가 뻗치고 하룻 밤을 사령탑과 순교비가 방광하였다.』
<법화정사 도림스님으로 부터 받은 책>
<허응당 보우대사>
보우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세우고 도첩제도(度牒制度)를 부활시키는 등
조선시대의 억불 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승려이다.
1565년(명종 20) 6월 25일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그 해 10월 초 유배지인
북제주군 어도봉 인근에서 입적하였다.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활동사항>
보우는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서 출가하였으며,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1548년(명종 3) 문정황후의 부름을 받고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50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세우고, 1551년에는 도승시(度僧試)를 실시하여
도첩제도(度牒制度)를 부활시켰다. 1552년에는 승과(僧科)를 다시 설치하게 했다.
이때 배출된 인물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이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탄압이 심하여 1471년(성종 2)에는 간경도감을 폐지했으며,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도승시를 아예 없앴고, 유생들은 사찰을 방화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일삼았다.
이러한 시기에 보우는 출가를 하였다. 당시 문정왕후는 신앙심이 돈독하여
각종 불교 행사를 시행하였고,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명하여 선종과 교종을 다시 세우게 하였다.
문정왕후의 보호로 보우는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이때부터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요승을 죽이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65년 세자를 잃고 상심하던 문정왕후가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그러자 유생들은 문정왕후가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고 소식을 하였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했다며 보우를 배척하고 탄압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이 잇따르자 명종은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1565년에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유배된 이후에도 전국의 유생들이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
그 해 10월 초에 보우가 입적하였다고 『명종실록(明宗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저술및 작품>
저서로는 승려들의 시문을 모은 『허응당집(虛應堂集)』상하 2권, 승려들의 법어와 잡문을 모은
나암잡저(懶庵雜著)』1권, 조선 불교의 도량 의식의 지침서 역할을 한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권,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염불을 권장하는 『권념요록(勸念要錄)』1권 등이 있다.
허깨비가 허깨비 고을에 들어
오십여 년을 미치광이처럼 놀았네
인간의 영욕을 다 겪고
중의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른다.
幻人來入幻人鄕
五十餘年作戱狂
弄盡人間榮辱事
脫僧傀儡上蒼蒼
(동국대학교 역경원 ;<한글대장경> 김상일 번역
***동파의 처가집이 제주도 조천이다.
조천 고관사를 옛날에 참배를 했지만 이렇게 멋있고 웅장한 불사리탑사에서 새벽 묘심행보살과 108배를 했다.
이는 우리 평화통일의 염원이며 도림스님의 법력에 깊은 감사의 3배를 올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