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
남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
절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
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
절이름이 처음에는 감로사(甘露寺)에서 천은사로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고 한다. |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숨을 은(隱)자를 써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
멋진 일주문의 편액을 감상 할 수가 있었다. |
이광사(李匡師)도망(悼亡, 죽은 부인을 애도함)
我死骨爲灰(아사골위회)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此恨定不捐(차한정불연)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我生百輪轉(아생백륜전)
내가 살아 백 번을 윤회한대도
此恨應長全(차한응장전)
이 한(恨)은 정녕 살아 있으리
我恨旣如此(아한기여차)
내 한(恨)이 이와 같으니
君恨應亦然(군한응역연)
당신 한(恨)도 정녕 이러하리라
兩恨長不散(양한장불산)
두 한(恨)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必有會合緣(필유회합연)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因緣) 있으리
이광사는 유배를 떠나며 부인이 자살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죽은 부인을 애도함’(도망-悼亡)이란 시를 써서 부인의 영혼을 달랬다.
수홍루(垂虹縷)
일주문을 지나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보통 피안교라 부르고 있습니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곳은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피안교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를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사찰에 갈 때 피안교를 건너는 것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금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만큼 불자들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돌이켜 보는 경건한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
천은사에는 그 다리 위에 2층 누각인 수홍루가 있습니다.
수홍루는 정면 1칸, 측면 한칸인 2층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계곡과 어우러진 누각은 천은사를 대표하는 경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릅답습니다.
정면 현판의 글씨는 염제(念齊) 선생의 글씨입니다
천왕문(天王門)
수홍루를 지나면 위로 오르는 계단이 나오고 그 끝에 정면 3칸, 옆면 2칸의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습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며 속세의 잡귀가 불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천왕문은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는 불가의 세계인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의
궁궐을 형상화하여 세워졌습니다.
천왕문 앞에는 사찰에 따라 금강문을 세우기도 합니다.
범종각
<천은사 극락보전의 주련> |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
극락전 앞에 보름달 같이 밝은 모습으로 |
금빛의 보배 빛살은 허공 비추니, |
누군가 있어 명호를 일념 다해 부른다면, |
깜박할 사이 깨달아 무량 공덕 이루리라 |
임술년 7월 성당 김돈희 (惺堂 金敦熙)글씨 |
***소전 손재형선생의 스승이 성당 김돈희 선생입니다*** |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보제루(普濟樓) 현판> |
천은사에는 옛날에 잠깐 들려 3배만 하고 지나간 사찰이다. |
그러나 이번사찰순례에서 창암 이삼만 선생의 글씨를 접 할 수가 있었다는 것에 더 할수없이 |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
추사 김정희(1786-1856),눌인 조광진(1772-1840) ,창암 이삼만(1770-1847)은 조선후기 3대 |
명필가로 유명하다.그러나 추사는 추사체로 서예부문에 우뚝 솟아 있는까닭에 창암은 추사 |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
특히 동국진체는 조선의 독자적인 필체로 널리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
추사는 창암보다 16년 늦께 태어났지만 두사람은 서로가 교류한 적이 있었다. |
현판을 보고 사진 촬영을하고 저물어가는 지리산 가을 단풍에 물드는 저녁 노을은 |
너무나 아름다웠다. |
<천은사 극락보전(泉隱寺 極樂寶殿) |
보제루 맞은 편에는 극락보전이 있습니다. |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신 법당입니다. |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천은사는 |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이 사찰의 주된 전각입니다. 극락보전은1774년 혜암선사가 |
중수하면서 세운 전각으로서 조선 중기 이후의 전통적 다포계 양식을 충실히 |
따르고 있습니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높직한 방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
올렸습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줍니다
|
설선당
명부전
팔상전
관음전 바로 옆에 있는 팔상전은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774년 무렵에
처음 세워진 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으며
그 밖에 근래에 봉안된 영산후불탱화 및 팔상도 4폭이 있습니다.
관음전
극락보전 뒤로 계단을 올라가면 여러 전각 중 가운데 있는 전각이 관음전입니다.
대승불교의 수많은 불·보살 가운데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관음전인데, 사찰에 따라서는
원통전, 대비전, 보타전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며 그 뒤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 후불탱화를 봉안합니다
삼성전
삼성전은 관음전 우측(향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현재 ‘삼성전’과 함께 ‘칠성전’, ‘산왕각’
현판이 함께 걸려 있습니다. 안에는 치성광여래상과 독성상, 산신상, 동자상 2체가
봉안되었으며, 불화로는 최근에
그려진 칠성탱화 및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습니다.
회승당(會僧堂)
회승당(會僧堂)은 맞배지붕에 ‘ㄷ’자 모양의 건물로서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면 마루 끝에는 범종이 있는데, 몸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1778년(정조2)에
봉안된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문은 부조(浮彫)로 된 부분과 점각(點刻)으로 된 부분이 있으며 1778년에 해당되는
건륭 연호는 부조로 되어 있고 점각 부분에도 1880년(고종17)에 해당되는 연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1880년에 약간의 보수가 있었던 듯합니다. 명문으로는 그 밖에도
‘풍□진명(豊□鎭溟)’ 및 ‘남원천은부원중종(南原泉隱府院中鐘)’등의 글이 있습니다.
종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그만 총알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25 때 이곳 지리산의 형편이 어떠했는 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은사 당간지주
전 천은사 주지를 하셨던 평전스님의 동아일보 2010년8월27일 기사
<평전스님의 사리150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