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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대학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제주대학교 교수

by 동파 2021.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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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안재철교수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금번 제주불교신문에 연재를 인용합니다.

다소 어렵지만 열공하시길바랍니다.

 

 

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11]

【解說】⑴ ‘道德’은 ① ‘사회 구성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생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② ‘노자의 『道德經』’ ③ ‘僧侶나 도사가 修行하는 공부나 法術’ 등을 나타낸다.
흔히 무심코 ①로 해석하지만, ①의 뜻은 서양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만들어진
소위 일본제 한자단어가, 中華民國 초기 ?迅(루쉰) 등의 작가에 의해 소설작품에
쓰이면서, 다시 중국에 逆輸入됨으로써, 중국어에 편입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①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③으로 해석한다.
사실 道家에서는 ‘우주가 생성된 총원리’를 ‘道’라 하고, 사람이 生成된 원리를
‘사람의 德’, 물이 생성된 원리는 ‘물의 德’이라고 할 수 있듯이, ‘德’은 ‘개개 만물이
생성된 각각의 원리’라고 한다. 설명에 따르면 ‘道’와 ‘德’은 각각 ‘우주가 생성된
총원리’와 ‘개개 만물의 생성된 각각의 원리’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 같지만,
千江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떠있는 달은, 모두 하늘에 떠 있는 달이기 때문에,
결국 하늘에 떠있는 달도 千江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비추어진 달도 모두 동일한
달이듯이, 개개 만물이 생성된 각각의 원리인 ‘德’도, 결국 ‘우주가 생성된
총원리’인 ‘道’와 결코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것과도 같지 않으며, 단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과 자질 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⑵ ‘門庭’은 ① ‘뜰, 정원’ ② ‘가문 또는 가정’ ③ ‘실마리, 방법’ ④ ‘파벌’ ⑤ ‘궁궐, 궁전’
등의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②를 따른다.
⑶ ‘啓迪’은 ① ‘계발하다’ ② ‘깨우치다’ ③ ‘인도하다’ ④ ‘가르쳐 이끌어 주다.’ 등의
뜻이 있다.
⑷ ‘英靈’는 ① ‘자질이 英明하고 뛰어나다’ ② ‘걸출한 인재’ ③ ‘精靈, 神靈’
④ ‘죽은 이의 혼을 높여 이르는 말’ 등의 뜻이 있다.
⑸ ‘衲子’의 ‘衲’은 ‘衲衣(누더기 옷)’를 말한다. 즉 사람들이 쓰다버린 헝겊을 모아
조각조각 기워서 만든 옷을 衲衣라고 하며, 도를 닦는 이는 검소하게 입어야하기 때문에,
이 옷을 입는 이를 납자 또는 衲僧이라고 한다.
‘衲衣’는 袈裟(k???ya)의 일종으로 쓰레기 같은 것을 주어서 깨끗이 빨아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도 한다.
‘雲水衲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누더기 옷 한 벌만으로,
구름처럼 물처럼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떠도는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다.
⑹ ‘奮志’는 ① ‘솟구치는 의지’ ② ‘패기를 발산함’ 등의 뜻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②를 따라 해석한다. ‘奮志’와 유사한 書寫形式의 글자에 ‘奪志’가 있는데 이는
‘강제로 뜻을 바꾸게 하다.’라는 뜻이다. [예문] 孔子曰 “三軍 可奪帥也 匹夫 不可奪志也”
『論語·子罕』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삼군에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필부에게서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奮(*//) (떨칠 분)’은 ‘?(날개칠 순)’을 ‘밭(田)’ 위에 그린 모양으로,
‘?(훨훨 날 휘)’라는 뜻이 本義이며, ‘奪(/) (빼앗을 탈)’은 ‘손(又, 寸)에 지니고 있던 새가
날개 쳐 날아가(?) 잃어버리다’라는 뜻에서 引伸되어 주로 ‘물건을 잃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로서, ‘奮’과 ‘奪’은 서로 다른 글자이다,
두 글자의 本義로 판단해 보면, ‘奮志’는 ‘志를 일어나게 하는 것’이고,
‘奮志’는 ‘志를 빼앗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⑺ ‘志 (*//) ’는 『說文解字』에서 “意也.?心?.?亦聲(뜻이라는 뜻이다.
心과 ?(古文으로 之)를 따른다. ?는 또 소리를 나타낸다.)”라고 하였다.
즉 ‘志’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一路邁進하여 가는(之) 마음(心)’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禪要』에서는 ‘大信心(根)’, ‘大疑情’, ‘大憤志’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쓰고 있는데, ‘大憤志’라고 한 것은 ‘깨닫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오로지
수행하는 마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글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心·意·識’은 각각 阿賴耶識과 末那識,
그리고 了別境識 등을 나타내며, 또한 佛典 등에서 常用되는 ‘心·念·思·性·情’ 등과
‘慮’ 등을 살펴보면 결코 같은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뒤로 미룬다.
⑻ ‘關’이란 ‘關門’이다. 여기에서 관문이란 어떤 곳을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길목으로서 돌파하거나 통과하기 어려운 난관을 말한다.
‘無門關’이란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흔히 이것은 ①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없이 모든 곳이 막힌 관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② 습암 진훈(習菴 陳塤)이
쓴 『無門關』序文의 “說道無門이면 盡大地人得入하고 說道有門이면 無阿師分第一이라
([깨침의] 길에 [들어갈 수 있는 정해진] 門이 없다고 말하면, 온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고, [깨침의] 길에 [들어갈 수 있는 정해진] 門이 있다고 말하면,
첫 번째[의 자리] 를 차지하는 스님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에 따르면 ‘깨침의
길에 들어갈 수 있는 정해진 門이 없이 완전히 개방된 관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문이 없어 완전히 막혀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관문이지만, 문이 아예 없으면
누구라도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깨달음의 관문은 쉽게 통과할
수가 없다고 하니 왜인가? 이는 ‘사대부가 공부를 하여 科場에서 及第하고자 하면,
내가 공부하여 채점관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므로 어려울 것이고, 選佛場에서 及第하고자
하면 내가 공부하여 내가 평가를 할 것이므로 쉬울 것이지만, 과거에 급제한 이는 많아도,
깨친 이는 적으니, 왜 인가라고 묻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를 정리하여 아래와 같이 번역하였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하여 懸吐는 무시하였다.

 

【飜譯】[諸公의] 道德(수행공부나 法術)은 무리를 벗어났고, 가문은 險峻하였다.
[그리하여 자질이] 걸출한 衲子를 가르치고 이끌어, 의지를 발산하게 하고,
[祖師의] 關門을 뚫게 하여, 한 가문에 깊숙이 들게 하였다. [그러나] 다섯 파는
그 근원이 한가지이다.

출처 : 제주불교신문(http://www.jeju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