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전남 나주시 금성산길 83 다보사(多寶寺)
전화번호:061-334-4203
참배일:2014년3월22일(토요)
다보사로 오르는 길은 봄을 맞이한다.
언덕을 오르면 이곳이 나온다.다보사 다보여래천불보전이다
금강문
다보사(多寶寺)
다보사는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남쪽 기슭 일명 '다보사 골짜기'에 위치한다.
창건과 유래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661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1184년에 보조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조선 1568년 서산대사가 삼창하였다고 전한다.
1910년 이후 한국불교가 탄압받던 시기에는 이 절이 전통적인 임제종의 법맥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악계인 고승인 인곡-전강-금오-고암 스님등이
이곳에서 주석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우화스님이 30여년 동안 주석하여 많은
제자와 신도들을 교화하였고 호남의 대표적인 선도량을 이루었다.
다보사 대웅전의 문살에는 국화-매화-모란꽃 문양이 정교하고 뛰어난
솜씨로 새겨져 있어 매우 아름답다.
대웅전의 모습
대웅전 주련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다보사 대웅전 삼존불
전서체로 쓴 대웅전
雨華堂 大禪師
<우화스님 이야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지기 시작한지 장장 1천 6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한국불교 1600년 역사에는 실로 수많은 스님들이 지나 가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을 그 숱한 스님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
의 스님들에 대해서만 빈약한 기록에 의해 그 모습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단편적인 기록이라도 남아있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설화처럼,
전설처럼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빈약하기 그지없는 단편적인 기록마저 없는 스님의 이야기는 세월
이 흐를수록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져가고 있다.
누가 이 스님을 모르시나요?
이번에 특별히 단편적인 모습이나마 기록해두고 싶은 스님의 경우도 ‘잊혀
져 가는 스님’이다.
이런 맑고 향기롭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셨던 스님의 이야기가 영영 잊혀져
버린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누가 이 스님에 대해서 더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면 널리널리 묻고 물어
서라도 행장기 한권쯤 남겨드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누가 이 스님에 대해 알고 계신다면 제보해 주셨으면 한다.
전남 나주에 있는 다보사(多寶寺)에 우화 스님이 계셨다.
어떤 스님의 기억으로는 그 우화스님의 법명이 ‘우화(羽化)’라고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그 스님의 법명을 ‘우화(雨華)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출생연
도와 출생지, 그리고 출가사찰이나 열반일자도 아직 어디에 정확히 기록된
것이 없다.
몇몇 스님의 기억에 의하면 우화스님은 6·25 전부터 전라남도 나주 다보사
에서 수행하신 천진도인 스님이신데 효림스님의 글에 의하면 1970년 초까지
다보사에 살아계셨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6·25 동란때 윤고암스님이 피난내려와 다보사 주지를 맡으신 일이 있었는
데, 고암스님은 워낙 감투욕심이 없던 분이라 다보사에 있던 우화스님에게
주지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천진도인 우화스님도 욕심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얼른 주지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고암스님이 이렇게 통사정을 했다.
“우화스님, 내가 잠시 바람을 좀 쏘이고 올테니 그때까지만 제발 주지소임
을 좀 맡아주시오.”
잠시 한바뀌 돌아 바람을 쏘이고 오겠다는데야 그것마저 거절할 수 없었던
우화스님은 ‘잠시 한바퀴 돌아올 동안만 주지소임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고암스님은 바랑을 메고 다보사를 떠났고,
그날부터 임시 주지는 우화스님이 맡았다.
그리고 그후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잠시 한바퀴 돌고
오겠다’ 던 고암스님은 두 번 다시 다보사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뒤,
우화스님은 여전히 ‘잠시’를 믿으며 이렇게 말씀했다.
“생사가 화급한데 웬 탁발입니까?”
“어디서 고암스님을 만나뵙거든, 내가 지금도 다보사에서 스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우화스님이 충청남도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 산내암자인 정혜사에서 만공
선사를 모시고 수행하고 있을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양식이 넉넉한 사찰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여름철 결제에 들어가려면 스님들이 미리 탁발을 해다가
양식을 마련해 놓아야만 했었다.
그해 여름에도 결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든 수행자들이 걸망을 짊어지고
탁발에 나섰다.
그런데 유독 우화스님만은 탁발에 나서지 않았다.
만공스님이 이를 보고 크게 꾸짖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탁발을 나가지 않고 있는가?”
꾸중을 들은 우화스님은 급하게 절마당을 한바퀴 돌고나서
만공스님 앞에 섰다.
“스님, 생사대사(生死大事)가 급한 사람은 어찌해야 합니까?”
만공스님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급한 사람은 탁발할 여유조차 없겠지?”
천하의 만공스님도 우화스님의 천진스런 기개 앞에
두 손을 들고 만 셈이었다.
어느해 겨울, 우화스님은 신도 한분이 병들어 자리에 누워있다는 말을 듣고
그 신도를 위해 인삼을 사기 위해 금산까지 가셨다.
다른 사람들의 인삼은 나주읍내에도 있는데 뭘하러 멀리 금산까지 다녀오
셨느냐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약은 정성을 들여야 효험이 있는 것이라오.”
손쉽게 돈만 치르고 사온 약과 먼길을 왕복하여 정성스레 사온 약,
과연 어떤 약이 약발이 더 좋을까?
우화스님은 나주 다보사 주지를 ‘잠시’ 맡아가지고 계시는 동안에도 참선수
행하는 젊은 수좌들은 끔직히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수행자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탁발을 나가곤 했다.
하루는 우화스님이 탁발을 마치고 무거운 걸망을 맨체 어느 기차역 대합실
로 들어왔다.
저녁나절 완행열차를 타고 다보사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그 무거운 걸망을 맨체 대합실 안에 서 있었다.
이 때 누군가가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저기 저 의자에 빈 데가 있으니 가서 앉으시지 왜 서계십니까? 어서
가서 앉으세요.”
이때 우화스님이 합장하며 말했다.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마는 나는 아직 이렇게 서 있을만합니다.
의자란 원래 다리 아픈 사람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니
다리 아픈 사람이 앉도록 비워 두어야지요.”
“의자는 아픈 사람 위해 있는 것”
그러면서 우화스님은 그 무거운 걸망을 짊어진채 끝내 대합실 의자에는
앉지 않으셨다.
한번은 다보사에 도둑이 들었다.
우화스님이 다보사의 뒷간을 새로 짓기 위해 7년동안이나 돈을 모으고 있
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 도둑이 복면을 하고 부엌칼을 든 채 우화
스님을 위협했다.
“뒷간지을 돈 있는줄 알고 왔으니 돈을 내놔라!”
“뒷간 지으려고 7년동안 한 푼 안쓰고 모은 것이라 죽으면 죽었지
못내놓겠소.”
도둑은 밤새도록 위협했지만 우화스님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새벽녘이 되자 도둑이 포기했다.
“당신 같은 스님은 생전 첨 봤소.”
“멀쩡한 사람이 남의 돈을 뺏어가려면 누가 내놓겠소?
빌려달라면 모르지만.”
“그럼 제발 돈 좀 빌려주시오.
식구들이 굶고 있어서 그럽니다.”
우화스님은 그말을 듣자 두말없이 도둑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도둑이 정말로 다보사를 찾아와 참회하고 돈을 갚았다
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출처:울시(lemicka33)블로그에서
우화스님 부도탑
우화(雨華)스님 이야기
소학교 3년 중퇴 뒤 14살 때 출가
평생 짚신신고 짚방석에서 좌선
새벽 2시 일어난 뒤 눕는 일 없어
고양이에게도 “화두 잘 챙기거라”
전남 나주 금성산에 이르니 하늘 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과 땅과 계곡이
비로 인하여 함께 춤춘다. 우화(雨華)도인(1903~1976)의 환영식인가. 우화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수박을 들고 경내에 들어섰다. “아따 무겁게 뭔 이런 것을 사오시요. 글씨.”
적막한 경내에서 주지 일륜 스님(63)이 맞는다. 우화도인을 평생 시봉했고, 스승의 열반
뒤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수행하다 다시 스승의 자취를 쫓아 돌아온 그다. 마치 수줍음을
타는 여성 같은 표정이나 꾸밀 줄 모르는 진솔함은 스승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의 스승 우화는 한국의 선객들이 선사나 스님이라고 부르기보다 도인이라고 칭하기를
즐겨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전남 나주 다보사 선방에서 한철을 보낸 선객들은 티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같은 우화의 ‘천진’을 평생 잊지 못해 했고, 선원의 사랑방 격인
지대방에선 그의 일화가 늘 화제의 일미였다. 우화는 전남 담양의 성도(成道)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과 셋이서 살아가는데 아버지는 늘 우화를
못난이라며 미워했다. 그래서 소학교를 글씨도 깨우치기도 전인 3학년에 그만두어야 했다.
우화는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14살에 집을 나왔다.
발길 닿은 곳이 경남 함양 영각사였다. 그는 밥을 얻어먹으며 행자 노릇을 시작했다.
우화는 고달픈 행자생활 중에도 틈만 나면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못나고, 부모 복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 달라”고.
어느 날 꿈에 한 노승으로부터 “참선을 하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그는 참선 길에 나섰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배짱마저 없는 그의 삶은 수행처에서도 고달프기만 했다.
토굴에서 수행하다 병이 든 채 누더기를 입고 통도사를 찾아갔지만 걸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
변변한 은사도, 내놓을 문중도 없는 그는 선방에서도 문전 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공 선사를 찾아간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도 3번이나
방부(안거에 살겠다고 신청)를 거절당했다.
많은 식량을 탁발해 가서야 정혜사 선방에 들어간 우화는 한 번 온 공부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만공은 석 달간 한 철 안거를 마친 뒤 선방 납자들이 쓴 게송(깨달음의 시)
가운데 우화와 성철 선사의 것, 둘만을 인정했다고 한다. 우화가 부산 내원사에 이르자
경허-혜월의 법을 이은 운봉 선사가 그의 견처(깨달음)를 단박에 알아보고 법제자로 삼았다.
법(깨달음 또는 진리)을 전하고 받는 것 또한 꿈 속의 일이던가. 일륜 스님이 내보인 운봉의
친필 인가장엔 ’전법게’(법을 전함)가 아닌 ‘전몽게’(꿈을 전함)라고 쓰여 있었다.
그 뒤 우화는 불교세가 미약해 ‘앉아서 굶어죽기 딱 좋은’ 나주에서 다보사를 30여년이나
지켰다. 아예 돈을 쓸 줄도 몰랐던 우화는 꼬깃꼬깃한 돈을 한장씩 두장씩 모았지만,
승려들이 “여비 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꾸어달라고 하면 두 말 없이 주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빌려간 것은 후생에서라도 부처님과 대중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철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우화는 절에 아무도 없어도
혼자 죽비를 치고 참선을 시작했고, 공양시간이 되면 발우를 폈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았다. 우화는 잘 때도 반드시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으로 누웠고,
요를 방석 크기의 4분의 1로 개어 위쪽만을 덮었다. 황소바람이 노승의 몸에 몰아치는 것이
안타까워 제자 일륜이 방에 들어가 요를 펴서 온몸을 덮어드리고 방을 나와 문틈으로 방을
들여다보면 스승은 얼른 요를 다시 4분의1로 접어 위쪽만 덮었다. 안락함을 멀리함으로서
경책을 삼은 것이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면 온종일 다시 눕는 일이 없었다. 또 평생
천방석을 두고 짚방석을 깔고 좌선을 하고, 짚신만을 신었다. 여름이면 모기약을 뿌리지도,
모기를 잡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름철 그의 모시옷은 우화의 피를 포식해 배가 터져 죽은
모기들의 피로 시뻘겠다. 이처럼 미물에게도 그는 평등하게 대했다.
(봉찬회 카페에서 인용)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삶은
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순수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되면
기쁨은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따르듯이...
- 법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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