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는 여러번 이곳 정수사를 찾았지만
사진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은 오늘 2014년1월5일이다.
마니산 동쪽자락에 위치한 정수사는
639년(신라 선덕여왕 8년) 회정선사(懷正禪師)가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이름지었다. 그후 1423년(조선 세종 5년) 중창을 하고 3년 뒤인 1426년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중영(重營)할 때에 법당 서쪽에 맑은 물이 솟아남을
보고 정수사(淨水寺)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여기 맑은 물을 시음할 수가 있었기에 더 좋았다.
여기 이 맑은 물에
함허대사의 차에관한 시를 이야기하고 싶다.
함허대사의 다시(茶詩)
一椀茶出一片心
一片心在一椀茶
當用一椀茶一嘗
一嘗應生無量樂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어라
마땅히 이 차 한 잔 한 번 맛보시게
한 번 맛보시면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난다네
이 물맛에 취해
함허대사는
여기 精修寺를 淨水寺로했을까?
대웅전 부처님께 삼배를 먼저 올려야지만 물맛을 보고
대웅전에 참배하고 삼성각에 마니산 산신님께 삼배를 올렸다.
정수사 법당의 건축을 살펴보면 정면만 장대석으로 3단의 석축을 쌓은 기단
위에 운두가 높은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정면3칸에 측면3칸
건물의 전면에 1칸의 툇마루형식의 툇칸을 두어서 전면의 박공이 후면보다
더 길게 뻗어나와 지붕 측면이 비대칭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건축은 비슷한 시기의 건축인 개목사 원통전과 그 모습이 같다고
할 것이다. 창호의 특징은 전면으로 중앙문의 4짝이 꽃살문으로 꽃병에
색색이 연화와 모란이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꽂혀있는 모습인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내부는 2개의 고주(高柱)가 내부 뒷면으로 빠져있고, 고주사이에는 불벽을
두어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바닥은 남북으로 장귀틀을 보내어 장마루를
깔고, 천장은 중도리를 경계로하여 바깥기둥쪽으로 빗반자를 걸쳤는데,
그 내부 중앙부에는 우물반자로 만들었지만 종보의 하부가 드러나게 천장을
만들었다. 또다른 특징은 빗반자에는 ×자형으로 짜맞춘 반자틀을 노출시키고
그 위에 널을 길게 깐 것이 특징이다. 평주의 주두밑에 퇴보를 두어 퇴칸을
형성하게 하였는데, 퇴기둥위에 얹혀진 공포는 익공형식의 살미가 주두아래에서
뻗어나와 2출목의 살미를 이루어 퇴보와 도리를 받치게 되는 모습을 하고
내부의 살미는 운궁형으로 조각하여 퇴보를 받치고 있다.
외부로 출목된 첨차는 양단에 연봉과 꽃줄기를 투각(透刻)으로 조각하여 보기
힘든 매우 특수한 예를 보이고 있다. 또한 창방위의 공포사이에 화반 또한 같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조선초기에 조성된 모습이 아니라
후기의 중창때에 퇴칸을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초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배면의 공포로 외1출목의 전형적인
주심포계의 형식을 취한 구조로 주두밑에 헛첨차를 놓고 익공형 살미와
보를 얹혀 놓았는데, 이들 부재 사이를 띄어 놓고 소로를 놓은 점이
익공형식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첨차는 고식(古式)에서 잘보이고 있는 쌍S자형(연속연화무늬)으로 만들었다.
여기서의 특징은 헛첨차가 고식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바깥쪽으로 길게
뻗어나와 처마를 길게 내기 위한 수법으로 보이며, 파련대공으로된 동자주는
연화와 당초문을 아름답게 투각(透刻)조각하였지만, 마루대공은 간단하게 하여
투각하지 않은 파련대공으로 만들었다.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을 주었고, 고주는 평주열과 다르게 후면 기둥열 쪽으로
후퇴하여 서있는데, 대들보 밑에서 보아지를 끼워 바로 받치고 있다.
귀솟음은 3㎝정도의 차이로 있었고, 안쏠림은 집 전체가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알 수가 없다.
이 건물은 부분적으로 시대를 달리하고 있는데, 배면의 공포와 대공 등은
초기의 주심포계에서 보이는 특징을 하지만 전면의 퇴칸의 공포는 후기의
주심포계와 익공계가 혼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퇴보의 보뺄목의
끝부분 장식을 귀면(鬼面)으로 조각한 점을 보면 후대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의 보수현황은 1957년 보수공사를 했고, 1988년에는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1991년 마루공사와 단청공사를 하였다. 1996년에는 지붕과 공포 및 벽체등의
목부재를 교체하였고, 단청과 미장공사를 병행하였다.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해체보수를 하였다.
세종5년(1423년)준공된 대웅보전 보물제161호
정수사 대웅보전 주련
摩訶大法王(마하대법왕)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本來非조白(본래비조백)
隨處現靑黃(수처현적황)
거룩하고 위대하신 부처님께선
짧음도 길음도 또한 아니며
본래로 검지도 희지도 않고
인연따라 청황으로 나투신다네
여기 대웅전은
인전(仁田)신덕선(申德善)선생의 글씨를 볼 수가있었다.
아래 글을 공주 영평사의 일주문 글이다.
사진 처음부터 지장보살입상.보현보살입상.석가모니불.문수보살입상.관세음보살입상
지장탱화
1878년 제작된것으로 대웅보전 왼쪽 벽면에 걸려있다.
크기는 가로184cm 세로 156cm이며 그림 가운데에
지장보살을 크게 그리고 그 좌우로 지장의 권속과 시왕을
표현했는데,지장보살위쪽 좌우에 있는 권속들의 얼굴이
동물의 그것을 하고있는 점이 특별하다.
또한 지장보살 앞쪽 좌우에는 동자가있으며 이 가운데
왼쪽동자는 등에 함을지고있고 오른쪽 동자는 지장이
들고있어야 할 석장을 대신 들고있는 점이 색다른데,
이같은 도상은 드문것이다.
여기 꽃살무늬살을 보기위해 동파는 방문을 했다.
그러나 겨울이라 비닐에 가리고 있었고 좀더 다른 방법으로
볼 수가 있는 방법도 있을 법하지만 아쉽다.
아래 사진은 쌍계사의 꽃살무늬살이다.
삼성각
정수사 삼성각
오백나한전
오백나한전
전등본말사지에 수록된
정수사(淨水寺)
千古浮屠殿(천고부도전)
摩尼獄麓東(마니옥록동)
山回人境隔(산회인경격)
天豁海門通(천활해문통)
蜀魄啼斜月(촉백제사월)
梨花墮暗風(이화타암풍)
慙爲處竹累(참위처죽루)
一宿別仙翁(일숙별선옹)
蒙泉: 정수사 번역
천고의 부도전은
마니산의 동쪽 산록에 있구나.
산이 굽이돌아 속세의 분위기와 막히고
하늘 넓어 海門과 통하네.
두견새 지는 달에 울고
배꽃은 음습한 바람에 떨어지네.
원님에 매여있으니 부끄럽나니
하룻밤 자고 스님과 헤어지네
위 시에서 처럼 동악시인은 아니 강화도 부사는
이곳 정수사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시한수를 남기고
떠난 자국을 볼 수가있습니다.
蒙泉선생의 멋진 번역을 함께 올렸습니다.
***
東岳(동악) 李安訥(이안눌)
강도부사를 지냈던 동악 이안눌 시(詩)다.즉
강도부사는 강화도의 옛지명이며
문헌에보면 중수기를 쓰기도했고 정수사에 관하여 시(詩)
한수를 남기기도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좌의정 행(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원정(元禎)이고,
아버지는 진사 형(泂)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대호군(大護軍) 양의 딸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泌)에게 입양되었다
이안눌은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되었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 사직하였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었다.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정수사 종무소
정수사에 관하여
주지스님의 이야기를 듣고싶었지만
친견을 못했다.
나의 고향이라 정수사의 풍광은 더 아름답다.
저녁을 알리는 미풍에 풍경소리도 나를 반하게 만든다.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해안도로1258
전화번호:032-937-3617
참고자료:정수사 홈페이지와 본인이 소지한 전등본말사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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