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 심리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님이 찾아와 주셨다. 아직 몇 번 밖에 만나지 못한 사이라서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저 명상하는 것이 좋고 명상 수행이 우리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한다는 것 뿐이었다. 대부분 그 교수님이 말씀하시고 나는 찻잔을 손에 들고 경청하는 입장이다. 한참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그분은 대뜸 “스님은 왜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가끔 스님을 뵈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속에 있는 것 보다 산속에서 공부에만 전념하시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자 그 교수님은 다시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마치 본인이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고 있는 듯 산속 생활에 대해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스님,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하루 종일 수행하고, 그러다 배고프면 나물이나 약초 뜯어서 밥하고 비벼먹고, 허허! 또 저녁에 가만히 방안에서 눈감고 앉아 있으면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듣고 있고, 참 기가막히지요! 우리야 여기저기 얽히고 설 켜서 가고 싶어도 못갑니다.”
하도 실감나고 구성지게 말씀을 하신 탓인지 잠시 내 마음도 그 교수님이 그리는 그림 구경에 빠져 있다가 이내 들고 있던 찻잔의 느낌을 자각하는 것으로 되돌아 왔다. 본인의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찾아온 침묵이 어색하였던 건지 아니면 대답 없는 나의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그런 건지 후다닥 차 한 모금 드시고 그리시던 그림을 마저 그리셨다.
“스님, 제가요 산속에다 멋진 명상원을 짓고 싶습니다. 마당은 푸른 잔디가 넓게 깔려 있고 건물은 한옥으로 할 겁니다. 중간 공간에 마루를 넓게 만들어서 저녁에 달과 별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겁니다. 스님도 거기 와서 수행하세요. 제가 뒷바라지 잘해 드리겠습니다. 수행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매일 매일 즐겁게 차 마시고 수행하고 그렇게 살아봅시다. 그렇게 사는게 행복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근데 왜 스님은 아까부터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교수님, 지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어떠세요?”
“음악소리요? 음, 듣기 좋은데요.”
“지금 차 마시고 있는 이 방의 느낌은 어떠세요?”
“편안해요. 항상 여기 올 때마다 평온함을 느끼지요. 지금도 아주 평온합니다.”
“차맛은 어떻습니까?”
“스님이 주시는 차는 특별히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까부터 음악소리도 듣고, 따뜻한 찻잔도 느껴보고, 지금의 평온함도 느끼면서 이렇게 교수님과 앉아있다는 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런 즐거움들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가봐요?”
잠시 할 말을 잊고 멍하니 계시다 교수님이 찻잔을 내려놓으셨다.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차 마시고 대화하면서 그러면서 명상하면 더 좋지요. 나중에 산속 가서 할 생각만하는 대신에 지금 여기에서 직접 해보세요. 산에서 하는 것만큼 좋으실 겁니다.”
지장 스님 서울 대원정사 주지
1000호 [2009년 06월 02일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