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오일장)
오일장과 어머니
제주신보
2019.12.26
강은영 수필가
나는 가끔 오일장을 보러 간다.
닷새 만에 열리는 장터는 소박한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삶의 무대다.
이곳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유년시절의 향수어린 추억이 담겨있어 정겹다.
장터를 묵묵히 지켜온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에는 포근함과 그리움,
결핍과 혹독함이 서려있다. 그 추억이 어머니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데나 자리를 깔고 앉아 몇 줌의 채소를 앞에 놓고 오가는 이들을
구경하는 황혼의 노인들. 거친 세파와 싸웠던 삶의 터전을 묵연히
바라보며 세월을 팔고 있는 웅크린 그들의 등에서는,
늙어서도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살아가려는 제주여인의
강인한 의지가 엿보인다.
나는 또 흥정 없이 남은 채소를 몽땅 산다.
주름진 그들의 얼굴에 번지는 희미한 미소. 더불어 내 마음도 푸근해진다.
분주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장터.
그곳에는 생동하는 기운도 있지만,
지치고 고달픈 날을 견디며 끼니도 잊은 채,
모진 세파를 견뎌야 했던 통한의 슬픔도 공존한다.
흐르는 물에 둥글어지는 돌멩이처럼,
고통의 세월에 뾰족한 모서리가 마모되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했던
장돌뱅이의 삶은 치열했다.
눈물 없는 세월이 어디 있으랴.
그 시절 추억이 떠오르면 그리움에 울컥 설움이 북받친다.
오일장에는 어머니의 애환이 묻어있다.
내 어머니도 오일장에서 포목장사를 하던 장돌뱅이였다.
잠 한 번 편히 잘 수 없이 뜀박질하듯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삶은
험난하고 처절했다.
살을 에는 강추위에도 장날이면 어김없이 원거리에 있는 중문 장,
남원 장으로 오갔다. 트럭위에 짐 보따리를 싣고, 그 위에 여러 사람이
함께 짐짝처럼 타고 장터를 누볐다.
중문 장에 갈 때면 어머니는 가끔 나를 데리고 갔다.
당시 오일장은 비 가림도 없을 때라 너무 추웠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점심때는 꿩 메밀 칼국수를
시켜주며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던 어머니. 따스한 당신의 그 눈길이
아직도 선연하다.
장터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손님에게 살만한 물건을 내 놓으면 이것도 싫다,
저것도 마음에 안 든다, 그들의 취향에 맞을만한 물건을 권해도 살
것처럼 하다가 휙 하고 돌아서 가버린다.
얼마나 마음이 상했던지?“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어?” 하고 내가 투덜댄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고 이것아! 장사가 그리 쉬운 줄 아니?
장에 올 때는 공장(벽에 박은 못)에 마음을 걸어놓고 와야 하느니라.” 했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새삼 눈물겹다.
저녁 파장이 되자 트럭에 물건을 싣고 우리는 또 다시 짐짝이 되어 서로
몸을 의지하며 돌아온다. 도착하면 부엌 아궁이에는 연탄불마저 꺼져
있어 집에는 한기가 가득했다.
너무 추워 “연탄불이라도 좀 갈아놓지!” 하고 볼멘소리로 투정을 부리면
“아무소리마라.” 어머니는 두말도 못하게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한 지붕 아래 부엌을 따로 사용하던 큰 오빠 내외가 옆집에 살고 있어서
연탄불 정도는 살펴줄 줄 알았다.
우리는 그때서야 숯을 사다가 불을 피워 늦은 저녁밥을 지어 먹곤 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윈 나는 오빠들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게 안타까웠는지 막내인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지없었다.
홀로 버팀목이 되어 어머니는 다섯 남매를 건사하며 자식들 공부를 다 시켰다.
온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농번기에는 밭으로
나가 농사일까지 하셨다. 이제 겨우 살만하다 싶었을 때 어머니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다시 못 올 곳으로 황망히 가버리셨다.
고생만 하다 좋은 세월 한 번 누리지 못하고 가신 어머니.
당신을 생각하면 회한으로 가슴이 아리고 먹먹하다.
삶의 무게가 힘겨울 때면 나는 어머니가 겪었던 인고의 세월을 떠 올리곤 한다.
모야천지母也天只라고,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열려있는 하늘이다.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온 우주를 품어주는 원초적인 그런 자리.
어머니의 큰 사랑 덕에 아직도 지구가 건재하게 돌아가는 건 아닐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 사랑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지만,
어머니 그 사랑에 천만분의 일도 갚을 길 없어,
가신지 수십 년이 흘러도 어머니가 한없이 보고프다.
어느 작가의 글이 생각난다.
“나의 서재에는 수 천 수만 권의 책이 있지만 내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
영원히 읽지 못한 책 그것은 어머니.”라고.
오는 29일은 올해의 마지막 장날이다.
그날 나는 또 오일장을 보러 가서 생선도 사고, 채소와 과일도 한 아름 사고
와야겠다. 지인을 만나면 어묵도 함께 먹어야지.
아직도 기억에서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는 나.
그래서 장날이면 어머니를 만나러 오일장에 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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