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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

예술가의 용기를 읽으면서...

by 동파 201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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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事一言

 

    예술가의 용기

 

창조행위에는 무엇보다도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예술가가 나이 들어 기력이 떨어질 때 더욱 그렇다

문인화가 겸재 정선 (1676~1759)은 팔십 평생 붓을 묻어

무덤을 이룰 정도로 공력을 지극히 하였기 때문에

화성畵聖이 되었고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칠십 평생 벼루 10개를 구멍내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서성 書聖이 되었다

용기는 힘든시절에 더욱 고귀하다

세종 임금의 고손자로 태어나 묵죽의 일인자가 된

탄은 이정(1554~1626)은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맞아 오른팔이 끊어질뻔한

화를 당한다

하지만 다시 이어진 팔로 한 시대의 보물을 완성하니

금가루로 대나무 난초 매화 20점을 그린

삼청첩三淸帖이 그것이다

나라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예술로 헤쳐나간

이정의 정신은 예술가의 모범이 되었다

문화 절정기에 살았던 천재 예술가도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정조 임금이 그림그리는 일은 맡겼던

단원 김 홍도(1745~1806)는 1790년 3월 북경에서 돌아와

중병을 앓게 된다

다행히 두 어달여 만에 병석에서 일어나 그해 여름과 가을동안

용주사 대웅전 불화를 완성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높이 4m가 넘는 이 그림은 남아있는 김 홍도 그림가운데 가장 크다

큰병을 치른 후에도 기운을 북돋우어 어명을 받든 중년의 김홍도는

타고난 솜씨만큼이나 높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나라를 잃고 몸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예술가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항일애국지사이자 묵죽화가인 일주 김진우 (1883~1950)은 서른 여덟이던

1921년 2년동안 옥고를 치르는데 감옥안에서 자라밥을 뜯어내

붓을 만들어 맹물로 마루바닥에 대를 치는 연습끝에

새로운 대나무 그림을 얻어냈다

댓줄기는 창 같고 댓잎은 칼 같아 강철로 만든 병장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삼엄한 모습을 한 김진우의 묵죽은 일제하 조선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창조력의 고갈로 빈 종이와 캔버스를 마주하기 두렵거나

생계가 어려워 창작활동의 의지가 약해진 요즘 예술가들에게

선배 예술가들의 용기 있는 삶이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탁 현 규 / 간송미술관 연구원


 

***나의 이야기***

며칠전에 조선일보 一事一言에서

"예술가의 용기"

간송미술관 연구원 탁현규 선생의 글을 읽었습니다.

버렸던 신문을 다시 찾아서 다시읽으면서 지난날 고등학교시절

국어선생님이 벼루하나는 구명을 내야 글씨를 쓴다고했습니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벼루를 10개 구멍냈다고한다.

어린마음에 할아버지가 쓰시고 아버지가 사용하셨던 벼루가

가보처럼 전하여 오고있었다.

고등학교1학년 때의 일이다.

먹을 갈고 신문지위에 글씨를 연습을하고

연습종이가 없어서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송판때기에

콩기름을 바른 연습용 널판지가있었다.

사용을하면서 물걸레질을하면서 열심히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벼루를 구멍내기위하여

예리한 칼로 긁어 내면서까지 연습을했던

어리석은 행동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래서 구멍을 내면 뭘하나...

 동방연서회 여초선생을 찾아가고 배우려고 했지만

돈의 여유가 없었던 고교시절이다.

그러나 그 시절은 너무나 좋았다.

예술을 못하고 시장에서 장사를하는 장사꾼이지만

예술가는 사상이 있어야한다.

혼이 있어야한다.

한이 있어야한다.

아니 철저한 주관이 있어야한다.

남다른 모습이있어여한다.

며칠전 그림의 대필이 있어서는 아니된다고한다.

먹을 직접 갈고

먹 가는 시간에는 명상이 있어야한다.

가는 동안의 묵향속에서

참 나를 발견할수가있다.

 

붓을 계속 잡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반야심경을 사경하고는 아는 도반님들에게

증정 할 때에는 챙피해서 얼굴을 들지못한다.

 

2016년 5월22일 일요 저녁시간에

동파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