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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르게

결혼식에 왔다가는 천년고찰 봉은사 참배

by 동파 2015.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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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고는

여기 천년고찰 봉은사에 머물면서 주말을

보내시면 즐거운 토요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추사 김정희선생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봉은사 대웅전

 

 

추사 김정희선생이 쓴 "大雄殿" 현판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마지막 작품

"板殿"

여기 봉은사에는 판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불교 경전을 보관하여 놓은 곳으로 남호(南湖)영기(永奇)스님이 철종7년에(1856)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화엄경을 새겨 놓은 목판 3175장이 보관된 봉은사의 판전으로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또 이 판전은

 

南湖 永奇 律師(1820-1872)
스님은 경전의 판각에 주력하여 봉은사를 비롯한 지장암, 내원암, 흥국사 등에서
경판의 판각에 힘을 썼다.
어렸을 적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문둥병까지 올라 병자의 무리와 함께 유량하다
철원 심원사에서 대연스님을 만나 스님의 권고로 지장기도 용맹정진을 통하여
문둥병을 낳고 대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경판을 판각하고 사경을 했는데 사경을 할 때에는
삼배일자(三拜一字)를 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몸에서 피를 받아 먹물을 타서 사경을 하기도 했다.
봉은사에서 당대의 석학 김정희 등 뜻을 같이 하는 여러 사람들과 화엄경 소초 80권을
비롯한 경전을 판각하여 판전을 지어 봉안하였습니다.

 

 

七十一果病中作

일흔 한살에 과가 병중에 쓰다.
여기에 과(果)는 추사 김정희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었다.
당시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하는 마지막 작품입니다.

 

봉은사김정희서판전현판(奉恩寺金正喜書板殿懸板)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3호
  지정연월일 : 1992년 12월 28일
  시 대 : 조선 철종 7년(1856)
  규모·양식: 1점
  재 료 : 나무널판에 채색·금박
  소 유 자: 봉은사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73 봉은사 
 
조선 19세기 전반의 대표적 문인서화가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만년에 쓴 봉은사 판전(板殿)의 현판 필적이다.
김정희의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 등
매우 많으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판서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의
아들로 태어나 18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823년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고 1836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며, 그 뒤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 북학(北學)의 중심인물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제자로서 일찍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북경에 들어가 그곳의 원로대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중년학자 완원(阮元, 1764∼1849)을 만나 스승·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1840년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 1848년 석방되었으나 1851년 헌종의 묘천(廟薦)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주창자로 지목되어 다시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풀려났다.
그 뒤 만년에 과천(果川) 등에 머물면서 시문과 서화로 자적하였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지향하며 고증적 태도를 견지했던 학자이다.
또 그는 서화에 두루 뛰어났으며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고증하는 등 금석학에도 뛰어났다.
저작으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이 전한다.

글씨는 예서(隸書)와 해서·행서를 많이 썼다. 예서는 전한(前漢) 시대의 고풍스런
예서를 바탕으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 추사 서예의 백미를 이루었고,
해서는 구양순(歐陽詢)을위시한 당나라 해서풍에 옹방강의 서풍을 가미했으며,
행서는 붓을 틀고 꺾는 전절(轉折)이
강렬하고 붓에 먹을 많이 안 묻히고 쓴 갈필(渴筆)이 심한 특유의 개성을 이루었다.

김정희는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잠시 머물면서 천년고찰 봉은사 구경을 잘 하셨으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