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던 지난 10월, 김태현 씨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 앞에 섰다. 김태현 씨가 마이크를 들고 몇 마디를 하자 자리 곳곳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들을 자랑하러 사람들 앞에 나섰다는 김태현 씨의 목소리에서는 기대와 기쁨 대신 오래된 그리움이 묻어났다.
자신이 자랑하려하는 아들 김기석 군은 지난 2011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16살의 어린 나이었다. 평소 10km 단축 마라톤을 거뜬히 뛸 정도로 건강했던 아들이었기에 갑작스러운 부재는 더욱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기말고사를 며칠 앞둔 12월의 초입, 기석 군은 학원을 가는 길에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김 씨는 그런 기석 군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김 씨도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김 씨가 병원을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기석 군은 큰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자신의 증상을 찬찬히 설명하던 기석 군이 김 씨의 눈 앞에서 갑자기 구토를 하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병명은 '뇌동류 파열에 의한 뇌출혈'. 수술이 시급했지만 병원의 사정 때문에 시기를 놓쳤고, 결국 전원을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수술을 위해 옮긴 병원에서 기석 군의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뇌사'가 추정된다는 말과 함께 소생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의식이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면서 김 씨는 생각했다. '제발 깨어나 다오.'라고. 그리고 또 생각했다.
'혹여나 이번 일로 장애가 생기게 되더라도 부모도 있고 누나들도 있는데, 기석이 하나 건사하지 못할까. 어떻게든 돌봐야지.'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혹시나 깨어나지 못하고 아들을 이대로 보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아들이었으니, 장기기증을 해서 여러 생명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지막 경우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여러 상황 가운데,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으면 했던 마지막 상황이 가족들 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180cm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기석 군은 겉으로 보기에도 그리고 마음도 멋진 아이었다. 어머니가 일하는 회사에서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틈틈이 하며 스스로 용돈을 벌고, 힘겨운 상황에 처한 친구들의 곁을 지키며 위로하던 아이, 그런 아이가 기석 군이었다. 10대 아이 같지 않게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들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비싼 메이커에 현혹되어 문제라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도 기석 군은 부모님이 사준 저렴한 점퍼 하나에 감사하며 진심으로 기뻐하던 아이었다. 김 씨는 살아있을 때에 기석 군에게 특별히 잘해 준 것이 없어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들은 다정하고 성실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버지를 칭찬받게 하는 효자였다.
"기석이가 장기기증을 했는데, 사람들이 다 저를 칭찬하더라고요.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아버지가 큰 결정을 했다면서요. 사실 제 장기를 떼어 남을 준 것도 아닌데, 기석이 대신 제가 칭찬을 받았죠. 생각할수록 정말 착한 아들인 겁니다. 살아서도 그렇게 잘하더니, 세상을 떠나면서도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받게 해줬으니..."
"장기기증은 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들이 워낙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니까 마지막에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싶어 했을 것 같아요. 비록 살아있을 때 아들이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런 아들의 마음을 그냥 대신 전해준 것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