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전(장경각)

종강스님의 임제록

by 동파 2012. 2. 10.
728x90

 

황벽 스님의 세 번에 걸친 구타는 간절한 할머니 마음
순박한 임제, 깨달음 이후 스승 뺨 때리는 범으로 변해
임제의 할(喝)은 깨달음 위한 활발발한 가르침의 방편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의 말씀을 따라 대우 스님에게 가서 한마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사진은 종광 스님의 강의 모습.

 

 

행록(行錄)


首座先到和尙處云, 問話底後生이 甚是如法하니 若來辭時에는 方便으로 接他하소서 向後穿鑿하야 成一株大樹하야 與天下人作廕凉去在리이다 師去辭한대 黃檗이 云, 不得往別處去요 汝向高安灘頭大愚處去하라 必爲汝說하리라.


해석) 목주 스님이 먼저 황벽 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말했다. “법을 여쭈러 왔던 후학은 아주 여법합니다.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해 스님께 들으면 방편을 써서 후학을 잘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잘 깎고 다듬어서 한그루의 큰 나무가 된다면 천하 사람들을 위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게 될 것입니다.” 임제 스님이 가서 하직인사를 드리자 황벽 스님이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반드시 고안의 여울목에 있는 대우 스님을 찾아가도록 하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을 해 주실 것이다.”


강의) 1978년 송광사 선방에서 정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송광사 선원에 앉아 있으면 앞으로 법당과 도량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는 또 조계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하루는 선원에서 열심히 참선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법당과 도량, 그 앞의 조계산까지 전부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 이것이 깨달음이로구나.” 그리고는 당시 방장 스님이셨던 구산 스님께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스님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구산 스님이 묻습니다. “그래, 무엇을 깨달았는고.” “일체가 탕연공적(蕩然空寂)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구산 스님이 슬며시 제 손을 붙잡더니, 방석 밑에 숨겨둔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아프냐.” “아픕니다.” 그러자 구산 스님이 말씀하십니다. “방금 탕연공적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졌을 터인데 어떻게 아플 수 있겠는가. 너는 진실하지 않다.”


제가 오래된 기억을 들려주는 이유는 바로 황벽 스님과 임제 스님의 관계를 통해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인연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때 구산 스님께서 저를 제대로 지도를 해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미혹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공부는 반드시 지도해주시는 눈 밝은 스승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황벽 스님의 회상에서 수좌로 있는 목주 스님은 스스로의 역할을 참으로 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안목 또한 탁월합니다. 만약 임제 스님이 목주 스님이라는 좋은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면 향기로운 이름을 세상에 전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목주 스님의 말을 듣고 하직인사를 하러 온 임제 스님에게 황벽 스님은 고안의 여울목에 있는 대우 스님의 처소로 가라고 말합니다. 탄두(灘頭)의 탄(灘)은 ‘여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탄두는 강의 여울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승전’에도 대우 스님은 여울목에서 사공노릇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마 강가에서 사공을 하며 수행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師到大愚한대 大愚問, 什麽處來오 師云, 黃檗處來니다 大愚云, 黃檗이 有何言句오 師云, 某甲이 三度問佛法的的大意라가 三度被打하니 不知某甲이 有過닛가 無過닛가 大愚云, 黃檗이 與麽老婆하야 爲汝得徹困이어늘 更來這裏하야 問有過無過아


해석)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에게 이르자 대우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황벽 스님의 처소에서 왔습니다.” 대우 스님이 다시 물었다. “황벽 스님은 어떤 말을 하시던가?”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대의를 물었다가 세 번을 얻어맞았습니다. 저에게 어떤 허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대우 스님이 말했다. “황벽 스님이 이렇게 노파심을 내며 너를 위해 정말로 정성을 다해 가르쳤건만 너는 나에게까지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가?”


강의) 노파(老婆)는 노파심(老婆心)을 말합니다. 정성을 다하여 손자를 걱정하며 보살피려는 할머니의 마음입니다.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을 때린 것은 이런 자애로운 할머니의 마음이었음을 대우 스님은 일깨우고 있습니다. 황벽 스님이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손자를 보살피는 할머니의 심정으로 정말 정성을 다해 가르쳤는데 너는 이곳에 와서 허물이나 따지고 있느냐며 핀잔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선어록에는 노파선(老婆禪)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을 가르쳤던 그런 정성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을 불필요하게 너무 자세히 가르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師於言下에 大悟云, 元來에 黃檗佛法이 無多子니다 大愚搊住云這尿牀鬼子야 適來에는 道有過無過러니 如今에 却道黃檗佛法이 無多子라하니 儞見箇什麽道理오 速道速道하라 師於大愚脅下에 築三拳한대 大愚托開云, 汝師는 黃檗이요 非干我事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이 한마디 말에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 원래 황벽 스님의 불법이 이런 것이었군요.” 그러자 대우 스님이 멱살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 오줌싸개 같은 놈아. 조금 전에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말하더니, 이제 와서 도리어 황벽 스님의 불법이 이런 것이었군요 라고 하다니, 너는 도대체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말해라. 어서 빨리 말해봐.” 그러자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 쥐어박았다. 대우 스님이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밀치면서 말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내가 간섭할 바가 아니다.”


강의) 임제 스님은 대우 스님의 한마디 말에 깨달았습니다. 이미 황벽 스님 회상에서 푹 익어서 개화의 시기만을 남겨두고 대우 스님에게로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임제 스님이 몰록 깨달은 다음에 “황벽불법(黃檗佛法)이 무다자(無多子)”라고 말합니다. “황벽 스님의 불법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군요.” 이런 뜻입니다. 전통적으로는 “황벽 스님의 불법이라 해봐야 별 것 아니군”이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스승인 황벽 스님의 불법이 별 것이 아니라면 황벽 스님의 불법을 이은 임제 스님의 불법은 별 것이겠습니까?


사실 ‘무다자(無多子)’라는 말은 중국 당나라 때의 속어입니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찾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말합니까? “아! 여기에 있었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무다자(無多子)는 그럴 때 쓰는 말입니다. “아! 황벽 스님의 불법이 바로 이것이었군요.” 이런 감탄사입니다. 물론 무다자(無多子)를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간단명료한 것으로 풀이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師辭大愚하고 却回黃檗하니 黃檗이 見來하고 便問, 這漢이 來來去去에 有什麽了期리요 師云, 祇爲老婆心切이니다 便人事了하고 侍立하니 黃檗이 問, 什麽處去來오 師云, 昨奉慈旨하야 令參大愚去來니다 黃檗이 云, 大愚有何言句오 師遂擧前話한대 黃檗云, 作麽生得這漢來하야 待痛與一頓고 師云, 說什麽待來오 卽今便喫하소서 隨後便掌하니 黃檗이 云, 這風顚漢이 却來這裏捋虎鬚로다 師便喝하니 黃檗이 云, 侍者야 引這風顚漢하야 參堂去하라


해석)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을 하직하고 다시 황벽 스님에게 돌아갔다. 이를 본 황벽 스님이 말했다. “이놈,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무슨 깨달음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 이에 임제 스님이 말했다. “다만 스님의 노파심이 간절했음을 제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임제 스님이 인사를 하고 나서 곁에 서자 황벽 스님이 물었다. “어디 갔다 왔느냐?” 임제 스님이 말했다. “지난번에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들어서 대우 스님을 참배하고 왔습니다.” 그러자 황벽 스님이 말했다. “대우 스님이 무슨 말을 하던고.” 이에 임제 스님은 앞서 대우 스님의 처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황벽 스님이 말했다. “어떻게 하면 대우 이놈을 기다렸다가 따끔하게 한방 먹일 수 있을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한방 먹이시지요.” 그리고는 바로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다. 황벽 스님이 말했다. “이 미친놈이 도리어 이곳에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그러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고함(喝)을 질렀다. 황벽 스님이 말했다. “시자야, 이 미친놈을 끌고 가서 선방에 들이도록 해라.”


강의) 행장 첫 대목에서의 임제 스님의 모습은 순수함과 순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대우 스님을 만나고 돌아온 임제 스님은 스승의 뺨을 후려치는 호랑이로 변해버렸습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렇게 변했는지 공부가 부족한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임제의 할(喝)이 등장합니다.


흔히 선문에서는 임제 할(喝), 덕산 방(棒)이라고 합니다. 가장 치열하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선지식들은 방할(棒喝)이 자재합니다. 누구나, 그리고 아무에게나 고함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 안 됩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과 편견(偏見)을 부셔야하는 절묘한 때를 맞춰 방과 할을 사용해야 합니다. 새끼가 알 속에서 나오기 위해 안에서 껍질을 쪼는 그 시점에 밖에서 어미닭이 함께 알을 쪼아주는 바로 줄탁동시(啐啄同時)의 때를 말합니다. 이렇듯 선문에서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선(禪)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선에 드라마틱한 활력과 반전이 있는 것은 이런 생명력 때문입니다.


임제 스님의 말을 들은 황벽 스님은 대우 스님을 한방 먹여야겠다고 말합니다. 쓸데없이 여러 말을 했다는 것이 이유이지만 내심 대우 스님이 스스로의 역할을 참 잘해줬구나 하는 칭찬과 고마움의 표시일 것입니다. 임제 스님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대우 스님을 지금 바로 때려주자며 황벽 스님의 뺨을 올립니다. 아마도 쓰다듬은 수준이겠지요. 황벽 스님이나 대우 스님이나 임제 스님에게는 같은 스승입니다. 곧 황벽 스님이 대우 스님이고 대우 스님이 황벽 스님입니다. 따라서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의 입장에서 황벽 스님을 대우 스님으로 보고 한 방 먹인 것입니다.  〈계속〉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28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