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와 종교, 사상과 가치관을 초월하여 세상사람 모두에게 깊은 영혼의 울림을 선사하고 있는 법정 스님. 스님의 입을 통해 세상에 울려 펴졌던 아름다운 언어의 사리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책 제목은 같은 만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의 『일기일회(一期一會)』. 모든 것은 생애 단 한번,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라는 경책이다.
책은 법정 스님 최초 법문집이다. 그동안 제법 많은 수필집이 나왔지만 스님의 법문집으로는 처음이다. 책 속의 법문은 서울 성북동의 작고 아름다운 절 길상사에서, 명동성당에서, 뉴욕 맨해튼과 세종문화회관에서, 청도 운문사와 원불교 대강당에서 대중들에게 설했던 아름답고 투명한 법문들을 모은 것이다.
봄에는 향기로운 꽃그늘 아래에서, 여름에는 장맛비를 피해 천막을 치고, 가을에는 마음까지 물들이는 단풍나무 아래서, 겨울에는 예고 없이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이른 새벽 강원도 산중 오두막에서 세상에 나오신 법정 스님을 만나기 위해 모인 대중들의 순백의 마음과 감동, 찬탄, 싱그러운 숨결도 함께 담았다. 스님의 법문은 조선의 백자처럼 투명하게 아름답다. 이른 아침 손에 든 한잔의 맑은 녹차처럼 깨끗하면서도 쌉쌀한 맛을 담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설해지는 법문의 상당수가 과거의 법문들을 재해석하거나 그것들의 원래 의미를 밝히고 있는데 반해, 법정 스님의 법문은 지금 현재 우리의 슬픔과 기쁨, 고통과 번뇌, 그리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상큼한 삶의 지혜까지 담고 있는 살아있는 법문이기 때문일 터이다.
“살아 있는 화두를 지녀야 합니다. 죽은 화두를 지니고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화두는 화두가 아닙니다. 진짜 살아있는 화두는 사거리나 동네 길목 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삶의 절실한 명제인 화두를 놓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사람은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삶의 문제이자 과제인 화두와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화두입니다.”(178쪽)
법정 스님의 법문은 서로의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상처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며 또한 우리 모두가 사바세계에 지고 온 짐을 힘을 모아 부리는 공간이다. 스님은 비록 우리와 떨어져 강원도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지만 우리들 자신보다 더욱 더 우리의 고통을, 고민을, 번민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아파하고, 위로해 준다. 그래서 언제나 변함없이 편안한 벗처럼 늘 곁에 두고 있다가 언제든 다시 꺼내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 법정 스님의 말이며 체취이며 지혜다.
법정 스님 법문의 일관된 주제는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부분이다. 스님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며 스스로 해친 자해의 업을 짊어지고 다음 생으로 건너가게 됨을 설명하고 불황과 경제 위기로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결과가 좋으면 어려움을 모르게 돼 영적 깊이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조류독감과 광우병 앞에서는 인간의 탐욕을 경책하고, 삶의 터전인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온 몸으로 아파하고 함께 반성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백 마디 말도 한 번의 실천을 따라가지 못하듯 법정 스님의 검소하고 질박한 삶이야말로 세상을 울리는 무설법문(無設無聞)이 아닐까 싶다.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 쓰고, 선물 포장지에 붓글씨를 쓰는 스님. 여러 저서에서 얻은 인세수입의 대부분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회향해 정작 스님이 중병에 걸렸을 때는 치료비를 절에서 빌려 써야만 했다. 말과 삶이 일치하는 맑은 선지식과 동시대를 살고 있음은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그래서 부끄러운 축복이다. 1만5000원.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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