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대지와 사생고락(死生苦樂)이 내 마음의 조작이라.
“콩 심어 콩이 나고 팥 뿌려 팥 거두니,
“인과응보가 몸 가는 데 그림자요. 소리에 울림이라.”
제 13장 회향
고명인은 찻집으로 다시 들어와 앉았지만 좀 전에 만났던 혜국과 대원성 보살이 마치 전생에 스쳤던 인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들에게 들었던 얘기들이 고명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고명인은 잠시 몽롱했던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어 차를 다시 우려내 마셨다. 그러나 차 맛과 향은 너무 우린 탓인지 나지 않았다. 찻집 아가씨가 눈치를 채고 말했다.
“차를 좀 더 드릴까요.”
“네.”
“송광사에서 묵으실 모양인가 봐요.”
“아닙니다. 떠날 겁니다.”
“마치 송광사에서 머무실 분 같아요. 혼자 오신 분들은 대개 머물다 가시거든요. 제가 안내해 드릴 수도 있어요.”
고명인은 아가씨에게 부탁을 안 했다. 지금 자신은 태백산 도솔암으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상음악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틀어드릴까 봐요.”
개량 한복을 입은 친절한 아가씨였다. 아가씨로 인해 갑자기 송광사에 머물고 싶은 마음도 일었다.
“아, 일타스님 법문 테이프인데 이걸로 들으면 어떠겠습니까.”
고명인은 대원성 보살에게 선물 받은 테이프를 아가씨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계산대 옆에 설치한 오디오에 테이프를 끼워 틀었다. 테이프의 녹음상태는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법당에서 수행자와 신도들을 상대로 법문한 일타의 육성을 들을 수 있음은 큰 행운이었다.
“‘불자들의 세 가지 법공양이란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 보리심을 성취하는 공양,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공양이니라.’
이것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 일대시교(一代時敎) 전체를 경, 율, 론 삼장(三藏)이라 하지만, 이것을 수행면으로는 계, 정, 혜 삼학(三學)이라 하고 선, 교, 율로 나누어 공부하게 됩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필경에는 일체(一體)가 되지만 첫째, 계율이라 하는 것은 불자 칠중(七衆)이 각기 받은바 계법으로 분한(分限)에 따른 자신의 행지(行止)를 바르게 다지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불살도음(不殺盜淫) 등의 행동질서와, 입으로는 네 가지 망어(妄語)를 않는 등 언어의 질서와, 생각으로는 탐, 진, 치를 멀리하는 등의 정신질서를 바로 잡아 신, 구, 의(身, 口, 意) 삼업을 조섭(調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마치 삼층 누각에 기초가 되는 일층과 같아서 ‘계로 인하여 선정이 생기고, 정으로 인해서 지혜를 이룬다’고 한 것입니다.
불자가 된 이는 누구나 이러한 계율을 준수하고 이것을 생활화하여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고 조심해서 방일(放逸)을 멀리해야만 합니다. 만일 계행을 지키지 않고 무시한다면 이 사람은 벌써 불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계행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인과를 생각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악도(惡道)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웃으며 업을 지었다가 울면서 그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불자들의 계법은 중생의 번뇌와 그에 따른 업을 청정하게 하여 해탈의 길을 보호하는 대방편인 것입니다.
번뇌(煩惱)가 다함이 없기에 한량없는 업(業)을 만들고, 그 업을 따라 과보(果報)를 받는 중생이 끝이 없어서 허공세계가 존재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중생들은 인, 연, 업, 과(因, 緣,業, 果)의 법칙대로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업보상속(業報相續)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백천 겁의 긴 세월을 지낸 뒤라도 자기가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아니해서, 인연이 마주칠 때, 반드시 그 과보를 다시 받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과를 깊이 믿고, 계행을 청정하게 행하는 사람은, 불법 중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불자인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씀에 ‘산하대지와 사생고락(死生苦樂)이 내 마음의 조작이라. 콩 심어 콩이 나고 팥 뿌려 팥 거두니, 인과응보가 몸 가는 데 그림자요. 소리에 울림이라’ 하였고, ‘눈 깜박하는 결에 마음에 이는 생각이 천만 겁에 생사고락의 씨가 된다’하였으니, 인과는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고명인이 눈을 감고 일타의 법문을 듣는 사이에 찻집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하고 외는 소리가 났다. 찻집에 난데없는 일타의 법문이 스피커를 통해 흐르고 있자 탄성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고명인은 눈을 뜨지 않고 일타의 법문을 마저 들었다.
“다음에는 신심과 발심, 즉 보리심을 발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불교에서는 신앙심(信仰心)과 신심(信心)이라는 말을 차원이 다르게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신앙심은 부처님께 의지하여 소원을 비는 마음입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여! 굽어 살펴 주옵소서’ 하고, 전심전력으로 지성을 다해서 기도하고 염불 주력(呪力)하는 곳에 불심광명은 높은 산봉우리를 먼저 비추듯, 중생심수(衆生心水)가 맑아질 때 구름이 걷히고 나타나는 달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감응도교(感應道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이가 부모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장성한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대로 자기 능력을 키워야 하듯이, 신심을 성취시켜야만 합니다. 신심이라 하는 것은, 장부자유충천기(丈夫自有衝天氣)라 하듯,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뿐인, 대자유 대자재의 안심입명과 무심삼매(無心三昧)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심을 만드는 방법이 바로 참선, 또는 관행(觀行)인 것입니다. ‘고요히 앉아 내 마음을 궁구(窮究)하니, 내게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한 가지 공안(公案), 즉 화두(話頭)를 간택하여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는 것입니다. 단단적적(單單的的)한 일단진심(一段眞心)이 확철대오(廓徹大悟) 성불작조(成佛作祖)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단진심은 오로지 간절한 마음 하나로 화두를 생각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골수에 사무치고 전신에 사무쳐 전신골수에 오직 한마음뿐이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되어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이 걸음걸음에 일념이고, 생각생각에 일념뿐인 상태에서 침식을 돈망(頓忘)하고 무심(無心)이 저절로 되면, 일념이 곧 만년이요, 만년이 곧 일념이며, 염겁(念劫)이 원융하여 몸도 없고 집도 없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어 다만 한 조각 광명뿐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본심신력(本心信力)이 견고하고 부동심(不動心)을 허공같이 성취하므로 얼굴에서는 빛이 발하고 몸에서는 향내가 나는 듯하며, 입을 열면 남에게 기쁨을 주고 가는 곳마다 항상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자비심을 품었으므로 미워함이 없고 청정행을 닦았으니 거짓을 모릅니다. 오욕(五欲)번뇌를 멸한 사람은 하늘이 공경하고, 송경염불하는 이는 선신이 옹호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보리심을 성취하는 공양인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아직 중생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중생들의 한량없는 고통이 보이고 있습니다. 어서어서 대지혜를 완성하여, 중생 제도의 대작불사를 이룩해야 하겠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돈’보다 ‘도(道)’가 더 중한 것이고, ‘도’라는 말은 바로 진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깬 사람’이라면 중생은 ‘꿈속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니, 우리의 신심이나 신앙심이 생시에 지극하고 간절했다면 잠자는 꿈속에서도 반드시 일여(一如)함을 얻어야만 할 것입니다. 꿈과 생시가 둘이 아닐 때, 기도에 가피력을 성취해서 중생의 고통을 덜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 일념도 이와 같이 여여(如如)하다면 누가 생사의 나루를 건너 해탈하지 못하겠습니까.
꿈속에서 얻는 가피력을 몽중가피(夢中加被)라고 합니다. 불보살의 신통도안(神通道眼)은 언제나 어디서나 법계에 충만하고 계시니, 기도 중 꿈속에 뚜렷한 서상(瑞相)을 보는 것은 부처님의 ‘몽자재 법문(夢自在 法門)’이라는 것입니다. 서몽(瑞夢) 같은 것이 없더라도 마음이 즐겁고 흐뭇하고 자신 있는 향상(向上)을 보이는 것은 명훈가피(冥熏加被)를 얻음이니, 쉬지 않고 꾸준히 한 우물을 파야만 합니다.
또, 기도하고 홀연히 성취된 기적적인 사실이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오랫동안 필름에 녹화되었던 나쁜 그림이나 소리가 기계의 작동으로 일시에 소실되고 좋은 그림이 새로 재현되어 나오듯이, 다겁생래(多怯生來)의 업장(業障)이 녹아짐에 죄멸복생(罪滅福生)하고 복지심령(福至心靈)하는 현상이니, 이것을 현현가피(現顯加被)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목적은 이러한 세 가지 가피력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행수를 바라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한 신앙심의 축적으로 이룩된 지성심의 결정인 것입니다.”
찻집에 들른 사람은 스님인 모양이었다. 일타의 법문을 즉시 알아보고 ‘일타스님 법문이구만’ 하고 중얼거리더니 찻집 아가씨에게 ‘우전 한 통만 종무소로 보내주세요’ 하고는 나갔다. 찻집 문에 단 풍경소리가 한동안 댕그랑댔다. 고명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일타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다.
“참선하는 화두공부에는 삼분단(三分段)으로 증험해 볼 수가 있습니다. 큰스님 게송에,
평소에 화두가 간단(間斷)이 없고
꿈속에도 분명하게 여일하여도
잠이 꼭 들었을 때 막연하다면
진겁의 생사고를 어떻게 해탈하랴.
日間活活常作主
夢裏明明恒如一
正睡着兮便漠然
塵劫生死苦奈何
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큰스님께서도,
자나 깨나 한결같이 되어 갈 적에
화두를 더욱더 놓치지 말라
이에 기쁘거나 슬픈 마음을 내지 말고
선지식을 찾아서 인가(印可)를 받을지니라.
漸得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
於此莫生喜悲心
須參本色永決疑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온종일 진세(塵世)에 묻혀 요요(擾擾)하고 있습니다. 하루해가 넘어가면 또 잠자리에 듭니다. 잠은 죽음의 사촌이라 했으니, 낮에는 살고 밤에는 죽는 셈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삼분단, 삼종가피로 가는 과정에 또 한 가지 방편(方便)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잠들기 직전에 ‘내가 몇 시에 일어나겠다’고 생각하고 잠들면 꼭 그 시간에 깨어지듯이, 잠자리에 들면서 일심으로 화두나 주력을 응용해 버릇하면 잠재의식 속에 암시되어, 이것이 공부에 일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법문 테이프가 다 돌아간 듯 오디오에서 찍찍거리는 잡음 소리를 났다. 아가씨가 고명인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재생해 다시 틀어드릴까요.”
“아닙니다.”
고명인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해가 하나 떠 있는 듯했다. 이처럼 마음속이 환하게 밝았던 경험은 처음이었다. 귀속에서는 아직도 ‘고요히 앉아 내 마음을 궁구하니, 내게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일타의 육성이 맴돌았다.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일타의 육성이 귀속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사무치고 골수에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기분이 들었다. 삼매란 이런 것일까. 의식하는 것마다 환했으며 걸림이 사라진 듯했다. 법문 속에 나오는 어려운 한문의 단어들이 낯익은 듯했고, 즉심시불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임을 체험했다.
고명인은 찻집을 나와 바로 위에 있는 불일서점으로 갔다. 일타가 지족암 시절에 법문한 내용을 편집하여 발간한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60대 초반부터 입적 때까지 펴낸 책이었는데 10권이 넘었다. 간경화로 몸이 쉬이 지치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승속을 가리지 않고 간절한 법문으로 회향했다는 방증이었다. 고명인은 다시 찻집으로 돌아와 아가씨에게 부탁했다.
“송광사에서 하룻밤 묵고 싶습니다.”
고명인은 일타에게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하나 받은 느낌이었다. 즉심시불이라는 화두였다. 고명인이 잠시 기다리며 서 있자, 아가씨가 원주의 허락을 받은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종무소로 올라오시래요.”
그날 밤, 고명인은 머리에 불이 붙은 듯 화급하게 난생 처음으로 ‘어째서, 어째서 즉심시불인가’ 하고 화두를 들었다. 신심이 솟구쳐 태백산 도솔암에 오르기 전이었지만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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