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성인의 자취를 좇아 생각하니 追念古聖蹟
이 아자방에서 큰 기틀을 얻었으매 於此得大機
나도 여기에서 묵언정진하며 我欲默無言
남은 해를 여여하게 보내리라. 殘年度如如
제 13장 회향
마침내 일타는 1972년 10월에 소승불교 국가인 태국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런 다음 미얀마로 향했고, 미얀마에서 네팔로 향했다. 그리고 네팔의 룸비니에서 인도로 들어가 불교 성지를 샅샅이 순례하는 동안 일타는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연비할 때 ‘부처님 법을 통하여 신심을 완전히 결정짓겠나이다’라고 발원했던 그 마음을 다시 냈다.
일타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안치된 쿠시나가라 열반당에 들어가서는 통곡하는 티베트 여인들을 보았다. 열반당 입구에는 부처님이 열반하려 하시자 아난존자가 붙들고 울었다는 사라나무 두 그루가 석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3km쯤 걸어가자 부처님을 화장한 터에 조성한 둥근 사리탑이 나타났다. 사리탑 너머로는 석양빛이 불상의 광배처럼 환했다. 일타는 합장한 채 탑돌이를 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사라쌍수 변백(變白)하고 불변 열반하시었네
제행무상 종소리는 승가탑에 울리도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인간천상 깨우치니
무상보리 이루는 법 여기에서 마치셨네
상부불멸 상부법계 청정안락 열반의 길
일진법계 진실도를 인과교철 시현일세.
쿠시나가라를 떠난 일타는 불교성지 순례를 멈추지 않았다.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한 전정각산,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의 보리수, 처음으로 설법한 녹야원 등등 인도의 여러 불교 성지를 순례한 일타는 바다를 건너 소승불교 국가인 스리랑카로 갔고, 이후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여러 기독교 국가의 종교 성지를 둘러보고 불법에 대한 신심과 참선만이 대자유를 얻을 수 있는 열쇠라는 확신을 다졌다.
만 2년 동안에 20여 개국을 만행한 일타는 귀국하자마자 해인사에 들렀다가 곧 태백산 도솔암으로 은거했다. 제자 몇 명을 데리고 연비할 때의 그 간절한 마음으로 입산했다. 인도와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불법이야말로 수승한 진리임을 뼛속 깊이 확신했던 바, 무한한 불성(佛性)의 힘을 더욱 증장하여 세속으로 돌아가 널리 회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시 찾은 도솔암 분위기는 일타가 연비를 하고 나서 처음 들어갔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전국의 불자들 사이에 이미 일타의 명성이 자자했으므로 일타를 흠모하는 불자들이 수행을 방해할 정도로 도솔암을 찾아 오르곤 했던 것이다. 대원성 보살이 연꽃모임의 회원들을 데리고 간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초창기 연꽃모임의 회원들은 28명이었십니더. 스님이 부산에 일이 있어 잠깐 나오셨을 때 우리들도 시간을 맞추어 따라갔지예. 부산에서 미니버스를 대절하여 갔는데, 모두 시주할 물건을 조금씩 들고 갔십니더. 저는 바께쓰에 김치를 가득 담아 가지고 갔십니더. 그때 큰시님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십니더.”
버스가 홍제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캄캄해져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별이 또록또록 빛나고 있을 때였다. 일타는 맨 앞에서 손전등을 비추며 일행을 안내하며 걸었다. 계곡의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 길이므로 일행 중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람도 많았다. 대원성도 마찬가지였다. 김치를 가득 담은 양동이의 무게 때문에 남들보다 더욱 낑낑댔다. 그러자 일타가 대원성의 양동이를 받아 걸망에 넣고 올랐다. 무겁고 둥그런 양동이가 일타의 등을 괴롭혔지만 일타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밤 1시가 돼서야 도솔암에 도착했는데, 일행은 방이 비좁아 대부분 앉은 채 잠을 잤다.
“큰시님께서 걸망에 김치 바께쓰를 넣고 산길을 오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송구할 따름입니더. 대한민국의 어떤 시님이 신도의 김치 바께쓰를 걸망에 넣고 산을 오르겠십니꺼.”
대원성 보살이 일타의 도솔암 시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데 큰시님께서는 도솔암 시절이 마냥 좋지는 않으셨는지 이런 말씀도 하셨지예. ‘자리를 못 잡고 남의 절에 맨날 사느니 도솔암에서 10년이고 15년이고 만사를 쉬면서 살고 싶은데,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더라. 그때는 상좌도 없고, 신도도 없으니까 하루 종일 수행만 하면 그만이었거든. 헌데 사흘이 멀다 하고 스님과 신도들이 찾아오더라고. 그러니까 상좌 이놈들이 찾아오는 신도들을 탓하며 수행이 안 된다고 노장을 쫓아버리고 우리끼리 결사할까, 하고 실제로 대중공사를 벌이더라고. 신도들도 마찬가지야. 눈 쌓인 겨울에 올라와서는 동상 걸렸다고 투덜대면서 스님은 사람 피해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고생시키려고 와 있다고 궁시렁궁시렁 대더라고.’ 그때가 1975년도의 일이었십니더.”
그런데 1976년에는 일타의 마음을 두고두고 아프게 할 큰 사건이 터졌다. 상좌 두 명이 도솔암 옆에 토굴을 짓고 살다 한 명이 죽은 사건이었다.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이었다. 상좌들이 큰 화로에 숯불을 담아 놓고 자던 중 일산화탄소에 중독이 되어 한 명이 죽고 다른 한 명이 실신한 사건이었다. 실신한 상좌는 일타가 업고 수십 리 밖의 병원으로 달려가 살려냈지만 죽은 상좌는 저승으로 보내야 했다.
일타는 상좌 자명(慈明)을 잃고는 하산하고 말았다. 때마침 해인사 지족암이 비어 있었으므로 일타는 그곳을 둥지 삼아 무려 23년 동안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지족암에 계시면서 미국과 남미를 순회하셨지예. 56세 땐가는 해인사 주지로 선출됐다가 59세 때 간경화를 핑계로 사임하셨십니더. 정말 핑계일 뿐이셨지예. 간경화 진단을 받으셨지만 큰시님께서는 수행으로 극병(克病)하셨고, 오히려 61세 때는 중국 불교 성지를 순례하시고 난 뒤 지리산 칠불암 선방으로 가셨으니까요.”
대원성 보살이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혜국이 장삼자락을 펄럭이며 들어오고 있었다. 고명인이 먼저 일어나 혜국을 맞았다. 혜국은 대원성 보살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는 듯 미소를 지었다.
“보살님, 얘기를 계속하세요. 우리 스님이 칠불암 계실 때 얘기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이고 시님, 제가 뭘 압니꺼. 제가 겪고 큰시님께 직접 들은 일 말고는 아무 것도 모릅니더. 큰시님께서 칠불암에 계실 때 얘기는 혜국시님께서 잘 아시지 않십니꺼.”
대원성 보살은 혜국이 다탁 앞에 반가부좌를 틀고 앉자,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겠다는 듯 손목에 찬 염주를 꺼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혜국은 고명인이 우려 낸 차를 마시며 말했다.
“우리 스님이 칠불암에 계실 때 있었던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할까요. 그때 칠불암 선방에서 함께 안거했던 수좌들 사이에 전해지는 얘깁니다.”
일타가 간경화를 앓게 된 까닭은 인도에서 불교성지를 순례할 때 철저하게 두타행을 한 데 있었다. 강행군을 하면서도 가섭존자의 두타행을 본받아 하루 한 끼만 먹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지켰던 것이다. 몸을 혹사시킨 결과 75kg이던 몸무게가 55kg으로 줄었고, 만성피로가 엄습했다. 귀국해서도 몸이 쉽게 지치곤 했다. 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미 간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 주지가 되어 종합검진을 받았을 때는 간경화로 악화돼 있었다. 그러나 일타는 수행으로 병을 한동안 극복하고는 중국 불교성지를 순례했으며, 정기검진 때 받은 두툼한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시자를 데리고 지리산 칠불암 선방인 아자방(亞字房)으로 들어와 버렸다.
일타는 아자방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광양 땅 백운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조렸다.
약과 병을 함께 다 놓아버리고
아자방 한가운데 앉았도다
멀리 바라보니 흰 구름이 나르고
가까이 들으니 두견새가 우는구나
옛 성인의 자취를 좇아 생각하니
이 아자방에서 큰 기틀을 얻었으매
나도 여기에서 묵언정진하며
남은 해를 여여하게 보내리라.
藥病俱放下 亞字房中坐
遠看白雲飛 近聞杜鵑啼
追念古聖蹟 於此得大機
我欲默無言 殘年度如如
이후 일타는 시자가 간청하므로 양약을 복용하는 대신에 자연요법인 황토치료를 받았다. 황토를 가슴과 배에 두툼하게 덮어 그 기운을 쐬게 하는 것이 황토치료였다. 그런데 매일 황토치료를 돕던 시자가 하루는 장난을 쳤다. 누워 있는 일타의 아랫배에 남근 형상을 만들어 세웠던 것이다. 아자방 선객들이 오다가다 일타 배 위의 남근 형상을 보고 웃었다. 이윽고 일타도 고개를 들어 남근 형상을 보고는 민망해 했다. 그러나 일타는 시자에게 ‘누가 내 배 위에 탑을 만들어 놓은 건가’ 하고 우스갯말을 던지며 딴청을 피웠다.
혜국의 얘기를 들은 고명인과 대원성 보살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른 시님 같았으면 시자에게 화를 냈을 깁니더.”
“맞습니다. 우리 스님 같은 분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대원성 보살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웃었다. 황토로 만든 남근 형상을 일타가 탑이라고 우스갯말로 받아넘긴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웃다가는 마지막에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시님, 왜 갑자기 혜업(慧業)시님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십니더. 큰시님께서는 여러 상좌들 중에 혜업시님도 아끼지 않으셨습니꺼.”
대원성 보살이 말하는 혜업은 일타의 상좌로서 일타처럼 간이 좋지 않아 감로사에서 고생했던 스님을 말했다.
“우리 스님은 선사, 율사, 법사 등 모든 방편에 수승하셨던 분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율사의 가풍을 이어갈 스님이 바로 혜업스님이었지요. 경과 율을 겸비하여 큰 재목이 될 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은 잘사는 사형사제가 있으면 아픔 몸을 이끌고 어디라도 찾아가 법담을 즐겨 나누었던 좋은 분이었습니다.”
대원성 보살이 또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찻자리가 숙연해졌다. 혜국의 미소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고명인은 대원성 보살이 평상심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만에 대원성 보살이 가까스로 말했다.
“큰시님께서는 당신이 드실 산삼을 혜업시님이 달여 먹도록 한 일이 있십니더.”
일타가 해인사 지족암에 살 때였다. 인자성 보살이 산삼이 생겼다며 대원성 보살을 찾아왔다. 두 보살은 일타에게 약으로 드리자고 해인사 지족암으로 갔다. 두 보살은 일타에게 산삼을 가져온 얘기를 하고 보자기를 풀었다. 그런데 일타가 ‘중이 더덕이면 최고지 무슨 산삼을 먹는가’ 하고는 거절했다. 일타가 얼굴을 붉히며 ‘그런 거라면 어서 집으로 가라’고 내치자 대원성 보살은 인자성 보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래도 대원성 보살이 버티고 앉아 있자, ‘아, 대원성아! 그 산삼을 우리 혜업이가 먹으면 병이 나으려나. 어서 감로사에 있는 혜업이를 찾아가거라’ 하며 달랬다. 할 수 없이 두 보살은 감로사로 가 혜업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산삼 보자기를 내밀었다. 그러자 혜업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은사도 안 드시는 산삼을 어찌 내가 먹는단 말이오. 어서 가져가세요.”
이번에는 대원성 보살도 물러서지 않았다.
“혜업시님이 이 산삼으로 나으시면 그것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지 시님이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큰시님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십니꺼.”
두 보살이 울다시피 애원하자 혜업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어젯밤 꿈이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수염이 하얀 어느 노인이 밤새도록 큰 가마솥에 약을 달려 긴 바가지로 계속 떠 주셔서 그 약을 다 받아먹었습니다.”
“시님, 그 약이 바로 이 산삼입니더. 어서 산삼을 드시고 회복하셔서 큰시님을 기쁘게 해드리소.”
두 보살은 그 자리에서 산삼을 달여 혜업에게 올렸다. 산삼으로 원기를 회복한 혜업은 곧 육신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5~6년을 더 살았다.
“그 뿐만 아닙니더. 큰시님께서는 가끔 혜업시님이 약값으로 쓰라고 용돈을 내놓고 가셨십니더.”
혜업이 감로사를 떠나 한 신도 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신도가 병으로 괴로워하는 혜업을 간병하고자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던 것이다. 어느 날 대원성은 일타를 안내하여 그 신도 집으로 갔다. 그때 일타가 봉투를 꺼내 혜업에게 내밀며 말했다.
“생과 사가 다를 바 없는 것, 화두 챙기고 살다 가거라.”
“죄송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네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아픈 몸에 집착하지 말고 새 몸을 받아 살거라.”
일타의 법문에 용기를 얻은 혜업은 건강을 되찾아 몇 년을 더 살았다. 속가 동생 지연이 마련해 준 작은 절 아란야로 옮겨갔고, 43세가 되어 입적하기 이틀 전에는 대원성 보살의 집으로 와 미음을 공양받기도 했던 것이다.
대원성이 또 눈물을 훔치자 혜국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살아생전에는 우리 스님이 나약하게 느껴질 만큼 너무 자비로운 것이 불만이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제자들이 도저히 닮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스님의 그런 모습인 것 같습니다.”
고명인도 일어나 부산으로 떠나는 혜국과 대원성 보살에게 합장을 했다. 찻집의 문을 열고 나오자 개울물 소리가 더 차갑게 들려왔다. 고명인은 꿈을 꾼 듯한 착각에 빠졌다. 혜국과 대원성 보살은 사라진 꿈인 듯 이제 송광사에 없었다. 그들의 잔상이 개울가 오솔길에 드리워진 한 줌의 햇살과 그림자처럼 어른거릴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