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장 회향
흰 구름을 무심히 바라보던 혜국이 ‘여기를 보십시오’ 하고는 마루 판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풀 먹인 잿빛 가사처럼 깔깔한 마루 판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 한 자락이 내려앉아 있을 뿐, 마루 판자는 얼룩 하나 없이 말끔했다.
“스님, 무엇을 보라는 말입니까.”
“전 이 마루 판자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곤 합니다.”
불현듯 혜국은 마루 판자를 통해서 무엇이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요사 저쪽에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보살이 젊은 스님의 안내를 받아 걸어오고 있었다. 보살을 본 혜국은 토방으로 내려섰다. 잘 아는 보살이 분명했다.
“시님, 죄송합니더. 고속도로에서 농민들이 길을 막고 데모를 하는 바람에 늦었십니더.”
“보살님, 저도 방금 왔습니다. 아참, 이 분은 고 선생인데 우리 스님을 알고 싶어 미국에서 오신 분입니다.”
보살이 합장하며 고명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큰시님을 알고 싶다고예.”
“그렇습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혜국이 한 마디 더 보태어 보살을 소개했다.
“우리 스님을 애기보살 때부터 오랫동안 시봉한 분이지요. 도움을 주실 겁니다.”
“아이고 시님, 제가 무슨 시봉을 했다고 그러십니꺼.”
“우리 스님께서 법문을 가장 활발하게 했던 40대 초부터 입적하실 때까지 시봉했던 유발상좌가 아닙니까.”
“시님, 저만 우리 큰시님을 모신 줄 아십니꺼. 전국 방방곡곡의 수많은 불자들이 우리 큰시님을 부처님처럼 따르고 의지하지 않았십니꺼.”
보살은 일타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합장했다. 고명인은 보살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살은 곧 그 자리를 뜨려 했다.
“시님, 대웅전부터 관음전, 국사전까지 참배하고 오겠십니더. 송광사 경내에 계속 계실 거지예.”
“저 아래 찻집에서 고 선생과 함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님, 부산 소림사 법문은 내일 오전입니더. 여기서 부산까지 3시간이면 충분하니까예, 천천히 참배하고 오겠십니더.”
“그러십시오, 보살님. 여기까지 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수고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닙니더. 시님도 모시고 송광사 방장 큰시님도 친견하고 얼마나 좋십니꺼.”
보살이 법당으로 가고 나자, 혜국이 조금 전에 하려다 만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이 마루 역시 구산 노장님의 흔적이 밴 곳입니다.”
마루에 내려앉은 햇살은 명주실처럼 부드럽고 빛이 났다. 마루 판자는 거무튀튀한 빛깔이었지만 고색의 창연함이 배어 있었다.
혜국이 구산 회상에서 3년 결사를 할 때였다. 그런데 사실은 말만 3년 결사지 혜국 혼자서 마친 결사였다. 처음 시작할 때는 혜암이 입승을 보고 적명, 무여, 정광, 휴암, 일장 등이 3년 동안 장좌불와에다 동구불출하기로 맹세했지만 사정이 생겨 첫 철에 깨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혜국 혼자 남아 3년 결사를 마친 셈이 됐는데, 그때 구산은 송광사 대중들에게 ‘혜국이 한쪽 눈이 열렸다’고 공공연하게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데 혜국의 3년 결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오랜 장좌불와의 후유증으로 혜국은 눕는 것이 불편했다. 누울 때마다 허리에 통증이 왔던 것이다. 구산은 혜국의 허리에 이상이 온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시자에게 인삼과 대추를 달인 한약을 받아 마셔왔던 구산은 한밤중마다 그 약사발을 아무도 몰래 혜국의 방문 앞에 놓고는 톡톡 두드리곤 했다. 구산이 약사발을 들고 오는 시간은 밤 11시 반에서 12시 사이였는데, 6달 내내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아무도 몰래 왔다가 가시곤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대중 중에는 저를 두고 ‘저기 애꾸눈이 온다’고 시기하는 수행자가 있었거든요. 애꾸눈이라고 한 것은 구산 노장님이 저를 두고 ‘한쪽 눈이 열렸다’고 자랑을 하시고 다니니까 그랬던 겁니다.”
“구산 큰스님도 일타 큰스님처럼 자비로운 분이시군요.”
“가풍이 좀 달라요. 구산 노장님은 늘 미소를 짓고 다니셨지만 선방에서는 몽둥이를 무지막지하게 휘둘렀어요. 한번은 제가 자정 무렵이 돼서 노장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졸았더니 마당에 한약을 확 쏟아버리고 돌아가셨지요. 구산 노장님은 그렇게 단호한 분이셨습니다.”
한 무리의 관광객이 기웃거리며 다가오자, 혜국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저는 송광사에 오면 법당보다도 먼저 이곳을 찾아 이 마루 판자를 보고서 구산 노장님을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울컥울컥 발심이 솟구치지요.”
고명인은 혜국을 따라 일어서 토방을 내려섰다. 그제야 혜국은 송광사에서 볼 일을 마치려는 듯 잰걸음으로 요사를 나서며 말했다.
“1시간 후쯤에나 일주문 밖 찻집에서 보지요. 전 노장님 부도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저도 경내에 좀 있다가 찻집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고명인은 요사를 나와 비슷비슷한 가람들을 먼발치에서 보는 시늉을 하다가 바로 찻집으로 내려갔다. 찻집은 서점 바로 밑의 개울가에 있었다. 보를 타고 흘러넘치는 개울물 소리가 돌돌돌 들려오는 곳에 찻집이 있었다.
고명인은 혼자서 작설차를 서너 잔 우려 마셨다. 아직 차 맛에 익숙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절에서만큼은 커피보다는 차가 먼저 당겼다. 고명인은 찻집에서 비치한 지도를 빌려 태백산 도솔암의 위치를 찾았다.
도솔암의 행정구역은 경북 봉화군 소천면 고선 1리였다. 그렇다고 도솔암이 고선 1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등고선 위에 도솔암을 가리키는 듯한 卍자 부호는 고선 1리에서 홍점골 골짜기 끝에 있었다. 고명인은 혜국이 한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스님은 나에게 도솔암에서 며칠만이라도 화두를 들고 참선하라고 하셨지. 그러면 일타 큰스님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을 거라는 말씀도 하셨고. 화두는 큰스님에게 탄다고 하는데 지금 나에게는 화두가 없지 않은가.”
고명인은 자신이 아는 화두를 귀동냥한 대로 헤아렸다. 일타가 들었던 염화시중, 경봉이 들었던 무자, 성철이 혜국을 윽박질렀던 덕산탁발화 등등을 떠올렸다. 그러나 무슨 화두를 들어야 할지 막연했고 도무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보살이 생각보다 빨리 찻집으로 들어왔다. 고명인은 일어나 보살을 맞았다. 자리를 창 쪽으로 옮겨 앉았다.
“이거 우리 큰스님께서 법문하신 테이프거든예. 저기 서점에서 샀십니더.”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송광사에 온 기념으로 염주 몇 개 사러 갔다가 눈에 띄어서 샀십니더. 우리 큰스님을 알고 싶어 미국에서 왔다카니 반갑지 않십니꺼.”
“차에서 들어 보겠습니다.”
찻집은 한가했다. 방 형태의 맞은편 다실에 여러 보살들이 젊은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을 뿐 대낮의 찻집은 텅 비어 있었다. 고명인은 보살의 손에 감긴 단주 알이 참 곱다고 생각했다. 머루 알처럼 작은 것들이 번들번들 반짝이고 있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미국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는 고명인이라고 합니다.”
“대원성이라 합니더. 고암 종정 큰시님께서 계를 주셨고, 일타 큰시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십니더. 일타 큰시님을 처음 뵌 것이 아마 1966년도였을 깁니더.”
화엄사 전강 회상을 떠난 일타가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회상에서 안거하고 난 다음 해인사로 가 머문 때가 1965년도였으니 대원성 보살의 기억은 정확했다. 일타는 그때부터 1972년까지 해인사에서 머물렀는데, 안거 때는 선방인 퇴설당에서 보냈고 해제하면 관음전에서 살았던 것이다.
또한 일타로서는 승속을 불문하고 법문을 가장 왕성하게 설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해제 철이 되면 부산의 감로사나 소림사에서 정기적인 법문을 했고, 송광사와 범어사, 통도사 등에서 보살계살림 때마다 법문을 도맡았던 것이다.
대원성 보살은 고명인에게 스스럼없이 일타를 만나게 된 인연을 얘기했다.
“친정아버지가 부산 대각사 뒤에서 한약방을 하고 계셨십니더. 자연 시님들이 우리 집을 자주 찾아와 한약을 많이 지어갔지예. 그래서 저는 어린 나이에 자연스럽게 시님들을 많이 뵐 수 있었십니더. 특히 일타 큰시님께서는 철없는 저를 귀여워하셨지예. 당시에는 처녀가 절에 다니는 일이 드물어 절에 가면 듬뿍 사랑을 받았십니더. 저는 부산 감로사로 100일 새벽기도를 하러 다니면서 일타 큰시님을 자주 뵀십니더.”
감로사는 일타의 외삼촌스님인 보경이 주지로 있는 절이었다. 그런 속가의 인연으로 일타는 해제 철이 되면 감로사를 자주 왔는데, 20대 초반의 대원성이 새벽에 108배를 하고 나오면 꼭 차를 우려 주곤 했다. 대원성 보살은 그때가 그리운 듯 큰 입을 비쭉이며 말했다.
“일타 큰시님이 계신 방에 들어가면 모르는 시님들이 방에 가득 많았십니더. 아가씨는 나 혼자뿐이라 부끄러워 차를 돌아앉아 훌쩍 마시곤 했십니더. 그러면 일타 큰시님께서 ‘애기보살은 차를 물 먹듯이 마시는구먼’ 하고 나무라셨지예. 어떤 날은 제가 ‘시님은 차를 병아리 눈물만큼 주시면서 야단은 황소처럼 하시는교’ 하고 어리광을 부린 적도 있었십니더.”
이후 대원성은 자신을 불문(佛門)으로 깊숙이 인도해주는 일타를 졸졸 따라다녔다. 방생법회를 따라간 적도 있었다. 신도들은 버스에 타고 대원성은 애기보살이라 하여 스님이 탄 승용차를 탔다. 방생법회장에는 방생할 물고기를 파는 장사들로 북적거렸다. 대원성이 어느 고기장사 물동이를 가리키며 ‘가장 큰 것으로 주세요’ 하자, 일타가 ‘가만있어 봐라’ 하더니 고기장사 물동이에 든 고기를 모두 사버렸다. 그때 대원성이 ‘시님, 곧 죽을 것 같은 고기도 있는데 왜 다 사십니꺼’ 하고 의아해하자, 일타는 ‘고기들이 죽고 사는 것은 제 명이지만 살려주는 마음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며 신도들에게 고기를 물에 놓아 주게 했다.
“저는 그때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십니더. 시님은 요령을 흔들며 염불하신 뒤 방생법회를 마치시고 방생한 고기들 중에서 제일 크고 잘생긴 고기가 다음 생에 제 아들로 태어나라고 기도하셨지예. 그래서인지 수년 후 제가 둘째아들을 잉태하여서 태몽을 꿨는데 잘생긴 물고기가 물이 흐르는 도랑을 치솟으며 날더라고예.”
고명인은 일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늘 그랬지만 가슴이 훈훈해짐을 느꼈다. 생선을 꿴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대원성이 일타의 자비로운 면모를 얘기하는 동안 찻잔의 작설차향이 향기롭게 코끝을 스쳤다.
“한번은 길을 가시다가 흰 종이가 바람에 날려 가는 것을 보고 끝까지 따라가 주워 걸망에 넣으시길래 그 더러운 걸 뭣 하러 주우시느냐고 핀잔을 드렸더니 ‘이런 것은 누구든지 먼저 보는 사람이 주워야지’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십니더. 그러시더니 절에 돌아와 그 종이를 무릎에다 대고 연비하여 손가락이 한 개뿐인 손으로 곱게 펴서 다림질을 하시더라고예. 가위로 오린 깨끗한 부분의 종이는 화장실에 두고, 글이 써졌거나 더러운 부분은 아궁이에 놓고 태우시더라고예. 그뿐만 아닙니더. 우편물이 올 때마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개봉하여 그 봉투를 뒤집어 풀로 붙여 다시 사용하셨십니더.”
고명인은 대원성 보살의 얘기를 실감나게 들었다. 대원성 보살이 실제로 겪고 보았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원성은 친구들을 데리고 해인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당시 해인사는 지월, 성철, 법정, 보성 등등의 수좌들이 결제 철이 되면 퇴설당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해인사의 선풍을 진작시키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일타에게 마음의 큰 고비가 하나 닥쳤다. 1971년 해인사 대중들이 일타의 허락도 없이 주지로 선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일타는 방장인 성철을 찾아가 고사했다.
“방장스님께서는 늘 우리 대중들에게 말씀하신 게 하나 있습니다.”
“그기 뭐꼬.”
“공부를 위해 중노릇해야지 사람노릇을 위해 중노릇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손가락을 연비한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주지 소임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방장스님, 저는 달아날 주(走)자, 갈 지(之)자 주지를 하겠습니다.”
“허허허.”
일타는 그날 바로 걸망을 메고 해인사를 떠나 잠적해버렸다. 다음날 성철은 일타의 상좌 혜국을 불러 말했다.
“느그스님 도망갔다.”
“해인사 주지는 어떻게 하고요.”
“주지 안할라꼬 야반도주했다 말이다.”
“어찌 해야 합니까.”
“주지는 새로 뽑으면 된다. 그러니 니는 느그스님 갈아입을 옷이나 챙겨다 드려라.”
혜국은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마침내 도봉산의 한 토굴로 찾아가 일타를 만났다. 그때 일타가 혜국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내가 오대산에서 연비할 때의 마음은 ‘한 세상 안 태어난 셈치고 이 한 목숨 부처님께 바친다’는 거였다. 그런 발심의 힘으로 도솔암에서 잘 살았던 게지. 헌데 주지를 하라고 하니 갈등이 오지 않겠나. 그것도 40대 초반에 큰스님이니 주지니 하고 헛이름이 나기 시작하면 더 이상 공부하기 어려워지지 않겠나. 그래서 야반도주했던 거다.”
일타는 주지를 새로 선출한 다음 다시 해인사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어딘가로 떠나서 말뚝신심을 충전하고 싶은 생각만 날뿐이었다. 그러던 1972년 초 어느 날이었다. 일타는 부처님 성지인 인도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천축국 인도는 더운 나라다. 가사 한 벌, 발우 하나인 일의일발(一衣一鉢)에다 아무 데서나 누워 자면 그만일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되니 두타행이 가능할 터이고,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묵언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 부처님이 맨발로 걸으셨던 깨달음과 열반의 길을 나도 무소의 뿔처럼 걸으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