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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사찰

제주불교 순례길을 걷다 [1]

by 동파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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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사에서 바라본연북정)

 

제주불교 순례길을 걷다 [1] 
제주불교 역사의 시원-조천포구에서 제주순교삼성 모신 불사리탑사까지

음력설을 기준으로 갑진년 새해를 맞았다. 
입춘과 우수를 지나 봄소식이 남서풍을 타고 올라온다. 
올해는 불기 2568년, 그리고 석가모니 열반 후 1천 5백년이 지나 
제주도에 불교가 도래한 것이 고려 중기 이후이니 한라산 영봉을
 타고 탐라의 땅을 천년의 불국토로 적셨다. 새봄을 맞으며 
제주불교의 찬연한 순례길을 따라 불교를 위해 헌신했던 앞선 
선지식의 불심을 되새겨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서방정토, 피안세계를 꿈꾸며 
길을 걷다 보면 마주치는 돌과 들풀 하나에도 우주의 섭리가
 들어있고, 깨달음 아닌 것이 없으리라. 
순례는 제주의 관문인 조천포구부터 시작되었다. 
우수를 이틀 앞둔 17일, 전날 춥던 기온이 오르고, 
청명한 하늘이 드러난 아침햇살을 받으며 조천포구로 향했다. 
발걸음이 먼저 멈춘 곳은 조천포구다. 한라산에 잔설이 눈부시게 
올려 다 보이는 가운데, 맑고 투명한 옛 포구에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우리 불자들에게는 조천포가 남다른 뜻을 가진 곳이다. 
다름 아니라 숭유억불로 기울어져 가는 전통불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허응당 보우대사(虛應堂 普雨, 1509~1565)께서 유배를 
올 때 입도한 곳이 바로 이 자리이기 때문이다. 
보우대사는 1565년(명종20) 7월 7일 조천포로 들어와 8월 말경 
현재 제주시 애월읍 어도봉 근처에서 제주목사 변협(邊協)의 
독수(毒手)에 의해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최고의 승려가 유자들에 의해 몽둥이 집단폭행해 숨진 
참담하기만 한 역사의 비극이다.  

조천진성에 오르면 연북정이 북녘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을
 안겨준다. 연북정에 올라 북쪽 육지에서 오는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을 
제주유배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탐라국 시절에는 신라와 견주었고, 
일본 유구와 교류했으며, 중국의 주요 포구를 드나들었던 해상왕국의
 번영과 영화가 이곳에서 시작되었으리라. 그러나 왜 제주는 
공마(貢馬)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권력자들에게 쫓겨난 유배인들의 
와신상담(臥薪嘗膽)과 굴욕의 땅이 되었으며,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역린, 4.3의 슬픈 땅이 되었을까.  

연북정에서 나와 비석거리를 바라보며 좌측으로 축대가 이어져 있는 
밭터가 있다. 조천리 2815-9번지와 2815-10번지 일대인 이곳은 지금은 
없어진 고려시대 창건된 옛 관음사 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원진의 탐라지 등에는 관음사가 조천포구 위에 
정중당물이 있는 곳에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정중당물도 매립되었고 사찰 터도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 조선말 폐찰된 후 현재 6인의 공동소유지로 되어 있어 아직도 
다른 용도로 개발되거나 건물도 들어서지 못하였다. 
불교계에서 보다 고증을 하고 정비했으면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천 비석거리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0여m 가면 팽나무가 
하나 서 있는 놀이터가 있다. 이 놀이터에서 북쪽으로 들어서서 8-90m쯤 
되는 곳에 바위동산이 있고 그 위에 ‘琴臺’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천의 만세운동은 김시우 선생(1875∼1918)의 소상날에 맞추어 
일어났는데, 이 비는 이러한 3·1운동 거사의 뜻을 담아 
김시우 선생 타계 7년 후인 1925년 봄에 그의 문하생들과 그의 
자제인 김윤환이 주축이 되어 옛 집터인 금산을 정비하여 김형식이
 글을 지어 3·1운동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웠다. 
조천 금대비에서 조천야학터로 나와 옛 조천읍내길로 들어서면 
3·1운동이 시작된 옛 조천장터와 옛우물을 재현한 작은 공원과 
보호수가 작은 언덕에 버티고 서있는 마을의 중심지로 향하게 된다. 
그 중간 조천리 2473-1번지에 남강 이승훈 유배지가 있다. 
지금은 대문이 굳게 잠겨있지만, 문틈으로 들여다보면 작은 마당을
 앞으로 하고 현무암 벽에 시멘트를 바른 벽에는 이 집의 내력을 
적은 초록 동판이 벽에 박혀 있다. 이곳이 조선 말기의 교육운동가 
남강 이승훈 선생이 6개월 정도 유배 생활을 했던 집이다. 
민족대표 33인에 불교계 한용운과 백용성 등과 같이 긴밀하게 
교류하고 활동한 점에 비추어 이승훈은 기독교인이지만, 
대쪽같던 민족운동가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깊은 일이다. 

(평화불사리탑사)
오밀조밀한 옛 조천읍내길을 벗어나 조와로(조천-와흘)에 
접어들어 조금 오르다 보면 고관사를 만나게 된다. 
첫 인상은 매우 정갈한 경내에 부처님의 발바닥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보다 지장전을 향하고 있고, 
석탑도 지장전 앞에 자리한다. 지장전에 들어서면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장보살상이 무변심(無邊心)의 무한 대비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 부처님이 없는 세계에 살며 육도의 중생을 
교화한다는 대자대비함에 저절로 감사의 마음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주지 관우스님은 고관사를 경전 사경을 통한 수행 정진과 
꼬라순례단 걷기명상으로 생활불교 전법도량으로 신도들의 
마음을 챙기고 있다. 관우스님은 1999년 운문사 승가대학을 
거쳐 동국대에서 불교학과 중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0년간 선방에서 정진하였고, 관음사불교대학의 
사경반 지도를 하고 있다. 

(불사리탑사에서 조천방향을 바라보면서 동파)


다음은 오늘 예정된 마지막 종착지로 조천 언덕에 자리한 
통일불사리탑사다. 조와로를 따라 와흘로 가는 길을 걷다 
일주도로에 접해 있는 곳이다. 불사리탑사는 천년의 민족문화를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었던 조선시대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하다 
결국 유배지 제주에서 입적했던 허응당 보우대사와 
환성당 지안대사의 혼을 잇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남방불교 형식의 대칭미가 조화로운 원형의 절 안의 아미타전에 
들어서면 현세불인 아미타불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통일을 기원하며 일주문은 북을 향하고 있고, 
아미타불은 서쪽을 향해 좌정해 계신다. 
아미타전의 원형 천정은 온 우주로 통하며, 돔 중앙 아래에서
 ‘옴마니반메훔’ 진언을 염송하면 신비하게도 울림의 소리가 
우주와 합일되는 곳이다. 아미타부처님에게 염불왕생(念佛往生)으로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지극한 마음이 있다면 정토왕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리라.
칠불전에 들어서면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 등 일곱 부처님이 
계시고 그 앞에 부처님 진신사리와 아난존자 및 목련존자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부처님의 끝없는 중생 사랑의 마음이 쿠시나가르 
다비처에서 머나 먼 이곳까지 오게 된 인연에 마음이 절로 숙연해 진다.        
탑사 난간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아득한 수평선 너머 육지가 아스라하다. 
그리고 내려다 보이는 바닷가에 보우대사가 유배 올 때 제주도에 
첫 발걸음이 닿은 조천포구와 연북정이 자리한다.
오늘의 일정은 이렇게 두 시간의 순례로 마무리했다. 
직접 발길이 닿는 곳에 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육신을 지닌 중생이 머무름과 걷는 두 가지 존재 양상으로 방황하다가 
늘 항상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순례지에서 다시 겸손과 
존재의 근원을 새겨보는 시간이 되었다.

김은이 객원기자(인문학당 후마니타스 편집위원)

출처 : 제주불교신문(http://www.jeju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