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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동파)

강화도 가을 산방

by 동파 201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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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방>

 

나의 고향 강화도 고비마을(古阜)에는 천년고찰 적석사가 있다.

나의 원찰이다.어렸을적 할머니를 따라서 다니던 마을 절이다.

12월16일 일요일은 아버님 기일이다. 적석사 대웅전에 부모님 위패가 모셔저있다.

묘심행과 동행하여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여기 가을 산방을 방문했다.

관세음보살님을 모셔놓은 아주 깨끗하고 아담한 법당이다.

이곳에서 무애심보살님과 차(茶)를 함께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다반향초(茶半香初)라고 할까?잔잔히 흐르는 여운으로 많은 대화를 할 수가 있어 좋았습니다.

 

<레이디 경향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 산길을 굽이굽이 가다 보면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고려산이 나온다. 그 밑자락에 단풍나무와 팥꽃이 조화를 이룬 집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무애심이 있는 법당이다. 푯말 하나 없어 찾기 힘들지만 뜻이 있다면 왜 오지 못하겠는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물어물어 기어코 찾아온단다.

무애심,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이유



무애심은 수행자다. 그녀는 관음을 모시고 있지만 승(僧)이 아니기에 종교인이 아니라 했고, 미래를 보지만 굿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무속인이 아니라 했다. 굳이 말하자면 참선을 하는 수행자라는 것. 그녀는 과거 신통력 있는 예언은 물론 독특한 이력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 스튜어디스였으며 드라마 '왕꽃선녀님'의 실제 모델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동안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기도 생활을 하다 보면 장애를 많이 입어요. 가슴에 고통이 남죠. 업이 많은 사람을 대하면 그 업이 오롯이 저에게 넘어옵니다. 초반에는 억누를 수가 없었어요. 사람을 만나는 무게감에 자신을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강화에 들어와 참선을 하며 지냈어요."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참선하기 좋은 장소다. 법당에는 적막함과 묵직한 향내만이 가득 차 있다. 간간이 들리는 건 새 소리와 바람 소리뿐이다. "어떻게 이런 장소를 찾아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말씀을 듣고 왔다"고 한다.

"'적석사 밑으로 가라'는 말씀을 받아 찾아왔는데 옛날 계단식 논이 있더라고요. 제가 주인에게 졸라서 터를 냈어요. 새벽 4시 반에 치는 적석사 종성에 눈을 뜨고 저녁 6시 반 종성에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삼천일을 꼬박 기도를 하며 보냈다. 하루에 감자 한 알, 토마토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기도를 드렸다.

"기도할 때는 목숨을 걸고 합니다. 사람이 살이 빠지면 선연한 눈동자만 남아요. 아주 밝게 빛나지요. 이렇게 기도만 하면서 묻혀 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은 있었다. 푯말도 명함도 없으니 그저 적석사 밑에 산다는 소문만 듣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서 밤차로 올라와 집 앞 공터에서 돗자리를 깔고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법당을 수소문하는 바람에 이미 근방에는 그녀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동네 분들께 여간 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서 '가을산방'이라는 작은 푯말이라도 달아볼까 생각 중입니다. 삼천일 기도를 통해 어느 정도 몸을 다스리고 추스를 힘을 길렀으니 이젠 누구든지 찾아오면 차 한 잔 정도는 나눌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예언


무애심은 어릴 때부터 원인 모를 병명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소위 말하는 무병이었던 것.

"어린 마음에는 이런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죽고 싶었는데 죽어지지 않았죠. 제 스스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 시기를 거치고 언제부터인가 수행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새로운 삶을 시작한 거죠."

무애심은 사람들의 고통이나 서거를 많이 예언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모 시사 월간지를 통해 예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큰분들이 돌아가시는 것은 기도 중에 많이 봅니다. 소설가 박경리님은 웃으면서 '이제 홀가분하다'라고 한마디 하시고는 제 손에 만년필을 쥐어주셨죠. 그 다음날 미디어를 통해 그분의 죽음을 알았어요. 기꺼운 마음으로 생을 넘기셨다고 생각합니다."

무애심은 법정 스님의 열반도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전라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셨어요. 평생 스님이 쓰신 책의 겉표지를 뜯어내시고는 '보아라, 아무것도 아니다'고 한마디 하셨죠."

예언조차 한 편의 신화처럼 철학적이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을 예언하고 그 처참함에 한동안 눈물을 거둘 수 없었던 인물이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었다고 말한다.

"새벽 4시 반이었어요. 적석사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는데 그분이 바위를 밟고 뛰어올라 가셨어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이처럼 통통 뛰어가는 모습이셨죠. 의상은 평소 자주 입으시던 베이지색 점퍼였어요. 그리고 홀연히 산으로 올라가셨죠. 당일 아침 6시 반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담했어요. 자세히 기억나는 건 주변에 슬퍼하는 목소리가 장송곡처럼 울려 퍼졌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통성하셨고 저도 따라 울었습니다."

그러나 무애심은 자신은 그저 지켜볼 뿐이라고 한다. 큰 인물들에 대한 예언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날 찾아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단 한 시간이라도 최선을 다해 결가부좌하고 참선을 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메모해놓으면 거의 들어맞는다.

"하루는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스님이 보였죠. 그리고 실제로 그분이 방문하셨어요. 그런데 머리가 속세 사람처럼 길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왜 머리를 다시 기르셨어요' 했더니 '내가 승려라는 게 보이냐?'면서 깜짝 놀라시고는 '어떻게 보이느냐'며 매우 궁금해하셨어요. 본인은 40년 동안 참선하셨는데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속세에 나와 책이나 쓴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애심을 찾는 정치인들도 많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대리인들이 온다. 생년월일시와 이름자만 알면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나온다.

"요즘 특히 줄을 서야 할 시기가라서 그런지 정치인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지난 4월 보궐선거 전에는 입후보하신 분 중 한 분이 찾아오기도 하셨어요. 그렇지만 반갑지는 않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자꾸 세상 돌아가는 일에 기웃거리면 좋을 게 없거든요."

그녀는 정말 절박한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정치인이더라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다면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고행입니다. 우울해서 심리치료라도 받고 싶은데 쉽게 갈 수 없는 경우가 많죠. 누군가를 찾아가 실컷 울고 싶은 분들, '가까운 미래라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분들이 찾아오시면 성심껏 도와드릴 수 있어요."

세상에 지치고 힘들어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지금 무애심의 심정이다.

"삼천일 기도 후에는 마음을 열라는 말씀을 받았어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든 오시면 차 한 잔 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수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주석 ■취재 협조 / 가을산방(032-933-6118)>


***위 글은 이유진 기자님의 글을 인용했습니다. 누를 끼치면 연락을 주십시요.시정하겠습니다***

 

<무애심 보살님이 주신 카렌더에 글>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연촌마을

전화번호:032-933-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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