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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회현동

회현동 은행나무와 15정승 이야기

by 동파 201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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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은행나무를 식수하신 문익공 정광필 영정

 

 

 

(1)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세조8년)-1538년(중종33년) 동래정씨 15世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자는 사훈(士勛),호는 수부(守夫),1492년(성종23년) 진사에 오르고,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면, 그 뒤 성균관 학유.의정부 사록.봉상시 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 학정에 있을 때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고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1537년 총호사(總護使)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김해(金海)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김안로의 사사(賜死)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廟庭)과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배향되었다.
문집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적방여산경견원(積謗如山竟見原) 

 

          東萊 鄭氏 영의정 鄭光弼 김해로 귀양 가시면서 남긴 시  

                  

積謗如山竟見原 (적방여산경견원)      

此生無計答天恩 (차생무계답천은)     

十登峻嶺雙垂淚 (십등준령쌍수루)      

三渡長江獨斷魂 (삼도장강독단혼)     

漠漠高峰雲發墨 (막막고봉운발묵)    

茫茫大野雨飜盆 (망망대야운번분)   

暮投臨海東村宿 (모투임해동촌숙)      

草獄肅肅竹作門 (초옥숙숙죽작문) 

    

훼방이 산같이 쌓였으나 마침내 근원을 바라본다네
이 인생이 하늘의 은혜를 보답 할 길이 없구나
열등선 높은 고개에서 두눈에 눈물을 흘렸으니
세번 긴 강을 건너며 나홀로 혼이 끊어지나보다
아득히 높은 산에서 구름이 먹을 뿜고 있는데
망망한 넓은 들판에 비가 퍼붓드시 쏟아지는구나
날 저물게 바닷가에 떨어저 동촌숙소에 이르게되니
초가집이 쓸쓸히 있고 대나무로 문을 하였구려


 

<군포에 정광필 묘역>

 

(2)임당공(林塘公) 정유길(鄭惟吉)

정유길(鄭惟吉)
1515년(중종 10)∼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손자로, 강화부사 정복겸(鄭福謙)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 김상용(金尙容)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정창연(鄭昌衍)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정언에 올랐다.
그뒤 공조좌랑 이조좌랑 중추부도사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그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 사헌부집의 교리 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고,
이어 이조참판 예조참판 대사간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
이황을 추천하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 1) 경상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그뒤 우찬성 판의금부사 판돈령부사를 거쳐 1581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 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뒤 158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되었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였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韓琦碑)〉가 있고, 저서로는 《임당유고》가 있다.

 

 

<사당동 상덕제에  정유길 묘>

 

(3)남봉공(南峰公) 정지연(鄭芝衍)

 

정지연(鄭芝衍)

1525년(중종 20)∼1583년(선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연지(衍之),
호는 남봉(南峰).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으로, 봉상시정 정유인(鄭惟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중호(李仲虎)로부터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는 가장 명망이 높았으며,
뒤에 이황(李滉) 서경덕(徐敬德)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 출입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66년 선조가 세자로 있을 때 이황의
추천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1569년(선조 6) 의금부도사로 재직시 나이 43세에 이르러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 지평 부교리 헌납 집의 직제학 등을 지내면서 청론(淸論)을 벌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뒤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1581년 우의정에 올랐으니, 관직에 나온 지 15년 만에
정승자리에 오른 예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1583년 신병이 깊어짐에 따라 거듭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그 역시 병중에서도 글로써 국사(國事)를 논의하다가 그해 57세로 죽었다.

죽음에 이르러 왕이 대신할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자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하였고, 또 유소(遺疏)로
이이(李珥)를 인재로 천거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장단점을 잘라 말한 다음, 그의 기질을 적절히
알아서 쓴다면 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 하였다.

<양평군 옥천면 소재>

(4)수죽공(水竹公) 정창연(鄭昌衍)

 

정창연(鄭昌衍)
1552년(명종 7)∼1636년(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고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때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니, 부사직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
정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그는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하여주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한 가운데 정방(政房)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당동 정창연 묘에서 내려다본 사진)

 

수죽정공신도비(水竹鄭公神道碑)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정창연(鄭昌衍)의 신도비.
 
지정번호  서울유형문화재 제62호 
지정연도  1984년 11월 3일 
소재지  서울 동작구 사당동 산32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석비 
 
본문
1984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창연(1552∼1636)의
신도비로 1655년(효종 6)에 만들어 세웠다.
정창연은 조선 선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鄭惟吉 : 1515~1588)의 아들이며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이다.
1579년(선조 12)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예조좌랑, 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1614년(광해군 6)에 우의정에 올랐으나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사직하였다.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좌의정이 되었고 그뒤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받았다.

비문은 이경여(李敬輿)가 지었으며 글씨는 심지원(沈之源)이 썼고 두전(頭篆)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화강암으로 된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비신과 이수는 한돌로 조각되었다.
받침돌의 복련판문(覆蓮瓣紋)과 이수의 조각은 매우 정교한 점이 특징인데 17세기 무렵의 전형적인 비석 작품이다.

 

 

<사당동에 있는 수죽정공신도비(水竹鄭公神道碑)>

 

(5)양파공(陽坡公) 정태화(鄭太和)

 

정태화(鄭太和)

1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春), 호는 양파(陽坡).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들이며, 모친은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와 예조참판 정만화(鄭萬和)의 형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 교리 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 사서 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 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행정부서에서는 예조의 좌랑, 이조의 좌랑 정랑, 의정부의 사인, 예빈시(禮賓寺) 제용감(濟用監)

장악원의 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면서 1631년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 1필을 수상하는 문재를 보였고,
또 사간으로 있던 1636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의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37년말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후 1649년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 참판, 한성부우윤 대사간, 평안도 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말부터는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이 무렵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문제로 조정 정신(廷臣)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고 있었고,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어서
중진관료로서의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조 형조 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난감한 직책을 되풀이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을 두지 않았던 까닭으로 전하고 있다.

심지어는 뒷날에 사신(史臣)이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할 정도였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갔고, 그뒤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에 머무르다가, 1651년(효종 2)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673년(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북벌정책과 예송(禮訟)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던 시기여서 당색을 기피하였고, 또한 정치화 정만화

정지화(鄭知和) 등을 비롯한 일가 친족들이 현 요직에 많이 올라 있었으므로 매우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그리하여 “이 나라를 정가(鄭哥)가 모두 움직인다.”는 야유를 듣기도 하고, 또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일은 적극 담당하려 하지 않고 처신만을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는 비평을
듣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기의 예송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하였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나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가 노구를 무릅쓰고 1662년에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연경에 다시 다녀온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73년 다섯번째의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이 되던 달에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 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으며, 그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시 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 2권 2책과, 1656년(효종 7)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 2권 2책이
있고, 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뒤에 충익(忠翼)으로 바꿈.).

 

 

<사당동에 양파공 정태화 묘>

(6)기주공(碁洲公)정치화(鄭致和)

 

정치화(鄭致和)
1609년(광해군 1)∼1677년(숙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 본관은 동래(東萊).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들이며, 모친은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동생이며, 좌의정 정지화(鄭知和)의 4촌이 된다.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얻지 못하여, 형 정태화의 막내아들 정재륜(鄭載崙)을 입양하였는데,
이가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관계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문한(文翰)의 관직을 거치다가, 1635년부터 1642년까지 동래부사가
되어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주로 3사의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638년 충청도암행어사로, 이듬해에는 함경도암행어사로, 1641년 황해도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고,
1640년에는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때 세자가 서양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45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소위 강옥(姜獄: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에게 죽음을 내린 사건)때
패초(牌招)를 올리지 않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1년반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1647년말에 평안도관찰사로 승진, 기용되었다.

평양에 부임한 지 1년반 만에 아버지의 병으로 잠시 사직하였다가, 1650년(효종 1)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고,
뒤이어 경기도관찰사 도승지 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667년(현종 8)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두루 역임하면서, 1660년과 1664년
동지사(冬至使)로 두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정책 대결이 표면화되었던 때여서 중도적
노선을 지키고자 하였던 그와 그의 일문(一門)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무려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겪다가, 형 정태화가 영의정을 내놓고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으면서 우의정 겸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 형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다.

1677년 9월 중추부영사로서 죽었다.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축출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중도적 노선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7)남곡공(南谷公) 정지화(鄭知和)

 

정지화(鄭知和)

1613년(광해군 5)∼1688년(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의 아들이며, 모친은 돈령부도정 민유경(閔有慶)의 딸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와는 4촌간이다. 이정남(李井男)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 정지화(鄭至和)의 셋째아들 정재희(鄭載禧)를 양자로 하였는데, 정재희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637년 제릉참봉(齊陵參奉)으로 있으면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다음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는 세자를 모셨다.

1640년 세자의 정조(正朝) 문안을 겸해서 귀국한 뒤, 홍문관수찬 교리 응교,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사헌부집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다가 1649년초 원주목사로 나갔으나, 효종이 즉위하면서 곧 세자시강원보덕에 임명되어 8개월 만에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삭감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뒤 병조참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고, 이어 안으로는 승지 대사간 등을 거치는 한편, 밖으로는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내다가 1664년(현종 5)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1674년 좌의정이 되기까지 각 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 역임하면서,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나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예조판서로 있던 1673년 영릉(寧陵)의 봉심(奉審)을 잘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한성 문밖으로 출송(黜送)되는
일이 있었다. 약 1년간 시골에서 지내다가 현종이 죽기 몇 달 전에 좌의정으로 기용되었으나,
곧 신병을 칭하여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았다.

현종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제2차 禮訟)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태화 정치화 등 친족들과 함께 서인이면서도 항상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남인들의 극단적인 처벌론을 무마하면서
그 스스로 화를 면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서인들을 죽음의 처지로부터 구하여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뒤, 1680년(숙종 6)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한동안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중추부의 판사나
영사로 지내면서 한가히 보내다가 76세로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의 졸기에서 “본성이 성색(聲色)과 사죽(絲竹)을 즐겨서 분대(粉黛)가 그 옆을 떠나지 않았고,
연희(宴嬉)에 빠져서 공무를 돌보지 않았으니, 여러 경상(卿相)의 자리를 지냈어도 이룩한 바가 없다.”고 비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으면 곧 관직을 내놓고 집에 들어앉았고, 제2차예송 때에는 송시열을 죽음에서 구하는 데 크게 힘썼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8)낙남공(洛南公) 정재숭(鄭載嵩)

 

정재숭(鄭載嵩)

 

명       재숭(載嵩)
성명    정재숭(鄭載崇), 정재숭(鄭載嵩)
자       자고(子高)
호       낙남(洛南), 송와(松窩), 의곡(義谷)

1632년(인조 10)∼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고(子高), 호는 송와(松窩).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아들이다.

1651년(효종 2) 사마시를 거쳐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2년 지평이 되고, 그 이듬해부터
정언 문학 교리 수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69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특진되었다.

이어서 동부승지, 1673년 병조참지, 1676년(숙종 2)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1679년 개성유수를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듬해 이조판서 좌참찬 대사헌 우참찬 병조판서 호조판서, 이어 공조판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1685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었으며, 이듬해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노환으로 사직,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9)정간공(貞簡公) 정석오(鄭錫五)

 

 정석오(鄭錫五)

 

명       석오(錫五)
성명    정석오(鄭錫五)
시호    정간(貞簡)
자       유호(攸好)

 

1691년(숙종 17)∼1748년(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호(攸好).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의 증손으로, 정혁선(鄭赫先)의 아들이며, 정효선(鄭孝先)에게 입양되었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수찬 교리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지평으로 있을 때 김일경(金一鏡) 등과 더불어 소론계열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탄핵,
신임사화를 주도하였으나 1725년 영조 즉위로 노론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삭출당하였다.

2년 후 정미환국으로 세자시강원사서로 다시 기용된 뒤, 응교?승지?동지의금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36년(영조 12) 등극진하사(登極進賀使)의 부사로서 정사 함평군(咸平君) 홍(泓)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판서를 거쳐 1746년 우의정에 특진, 곧 좌의정에 승진되고, 1748년 영돈령부사로서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가 되어 효현황후(孝賢皇后)시호 올린 것을 진하하고 연공(年貢)을 진헌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가던 중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0)충헌공(忠憲公) 정홍순(鄭弘淳)

정홍순(鄭弘淳)

1720년(숙종 46)∼1784년(정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의중(毅仲), 호는 호동(瓠東).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후손으로, 부친은 참판 정석삼(鄭錫三)이다.

1745년(영조 2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설서 이조정랑 지평 교리 이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문제에 특히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1762년 호조판서로서 예조판서를 겸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상(喪)에 장의(葬儀)를 주관하면서,
장헌세자의 의복과 금침에서부터 악모대리(幄帽帶履) 등 미세한 것까지 한쪽씩 떼내어 그때의 문부(文簿)와
 함께 봉하여 수자(守者)를 단속하고 이를 보관하였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한 다음해에, 앞서 세자의 장례 때 상례의 풍부 여부를 알고자 당시 예조판서였던 그를
대령하게 하므로, 그는 곧 서리를 시켜 당시 간직하여두었던 것을 내어다 보이자,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겨 곧 우의정에 제수하였으며, 이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승이 된 뒤에도 미세한 일에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여, 어느 때인가 자기집을 수리할 때 공인(工人)과
 더불어 일삯으로 서로 다툰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그의 아들이 “어른의 신분으로 천한 공인과 노임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까?”하니, 그는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인데, 내가 삯을 과히 주면 온 나라의 예가 되어 빈한한
백성들이 많은 곤란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또, 한때 그에게 파전(破錢)한푼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땜질하여 붙이는 데 두푼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두푼을 들여 한푼을 얻으면 오히려 한푼이 손해가 나는데 어째서 공은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나 개인은 한푼을 잃었어도 나라에는 한푼이 이익이 되니 어찌 이익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한다.

시호가 정민(貞敏)으로 내려졌다가, 뒤에 충헌(忠憲)으로 개시(改諡)되었다.

(11)문안공(文安公) 정존겸(鄭存謙)

 

정존겸(鄭存謙)

1722년(경종 2)∼1794년(정조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 양재(陽齋) 원촌(源村).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8대손으로,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의 5대손이며, 정문상(鄭文祥)의 아들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50년(영조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754년에는 횡성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교리?승지 등을 지냈다. 승지로 있을 때 1761년 4월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영조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영조는 세자의 서유(西遊)에
관여한 심발(沈 ) 유한소(兪漢簫) 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시켰는데 이때 그도 파면되었다.

그뒤 다시 등용되었으나 1772년 당론을 주장하였다 하여 북청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관계에 복귀,
이조판서를 지냈다.

1775년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는 소를 올려 세손을 보호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781년 《영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 편찬의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직하였고,
다음해 동지사(冬至使)로 부연(赴燕),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다시 우의정으로 세자사부(世子師傅)를 겸하였다.

1791년 영의정에 이어 영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철저한 시파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12)경산공(經山公) 정원용(鄭元容)

정원용(鄭元容)
1783년(정조 7)∼1873년(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부친은 돈령부도정 정동만(鄭東晩)이며, 모친은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정기세(鄭基世), 목사 정기년(鄭基年), 부사 정기명(鄭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내다가, 1821년 서북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청나라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 뒤의 철종)을 영립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어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궤장(几杖)을 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실록청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출신으로 20여년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경산집》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문헌공(文獻公) 정범조(鄭範朝)


정범조(鄭範朝)

 

1833년(순조 33)∼1897년(광무 1)(주1) 졸년
국역 승정원일기 1897년(고종 34) 7월 27일 기사 "장례원 경 민영규(閔泳奎)가 삼가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 정범조(鄭範朝)가 이번 8월 23일에 졸서하였다고 합니다."를 참고.
. 조선 말기의 대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우서(禹書), 호는 규당(葵堂). 우찬성
정기세(鄭基世)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되고, 1860년 대교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좌참찬에 승진한 뒤 1865년 이조참의, 1869년 성균관대사성 규장각직제학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875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79년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 다음해 다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당상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사대교린사당상(事大交隣司堂上) 감공사당상경리사(監工司堂上經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 병조판서 및 한성부판윤, 그리고 1886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와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였으며, 같은해부터 수년간 여러 차례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갈된
국고를 맡아 타개책에 진력하였다.

1892년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4)선원공(仙源公) 김상용(金尙容)

 

김상용(金尙容)
1561년(명종 16)∼1637년(인조 15). 조선 인조 때의 상신(相臣)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 계옹(溪翁). 서울 출신.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이며,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형,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江華仙源村: 지금의 江華郡 仙源面 冷井里)으로 피난했다가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토벌과 명나라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1598년 승지에 발탁되고, 그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면서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출보(黜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30년(인조 8)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바로
사퇴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에게서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黃愼)?이춘영(李春英)?이정구(李廷龜)?오윤겸(吳允謙) 신흠(申欽)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鄭經世)와는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초에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2왕(二王: 晉의 王羲之?王獻之 父子)의 필법을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군수(豊德郡守)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전액(篆額)을 남기고 있다.

시조로 〈오륜가(五倫歌)〉 5장,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이 전한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自焚)이 아니라 실화(失火)때문이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선(朴東善) 강석기(姜碩期)
신익성(申翊聖) 등의 변호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안변 옥동서원(玉洞書院),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선원유고》 7권이 전하고, 판본은 안동 봉정사(鳳停寺)에 보관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청음공(淸陰公) 김상헌(金尙憲)

김상헌(金尙憲)

1570년(선조 3)∼1652년(효종 3). 조선 인조?효종 때의 상신(相臣).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
서간노인(西磵老人: 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 출생.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김대효(金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중에 보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 좌랑 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복명,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교리 응교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金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하여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숙특(淑慝: 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 도승지 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으며,
이정구(李廷龜) 김유(金?) 신익성(申翊聖) 이경여(李敬輿) 이경석(李景奭) 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集)〉〈
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서 인용***

여기 이글을 쓰면서 나는 역사학자 아니고 오직 동래정씨의 한사람으로 이곳 회현동 은행나무길을

매일 걸어가면서 많은 관심이 있어서 글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12정승이 아닌 13정승이고 안동 김씨의 두분을 넣어 15정승이 아닌가 하는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