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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불교대학

김지하 시인 동산불교대학에서 초청 특강

by 동파 201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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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월14일 토요일 오후4시

서울 동산불교대학 강당에서 법보신문과 함께 주관으로

김지하 시인 명사 초청 특강으로 경청을했습니다.

 

 

 

 

위 내용으로 9페이지 분량으로 읽는 형식의 강의로 진행했습니다.

 

 안동일 이사장님의 김지하 시인 소개

 양재동 구룡사 거사림회의 김재상 거사님을 이곳에서 만나다

김지하 시인님의 변혁적 생명학, 서다림의 자책을 거쳐서라는

주제의 특강을 듣고 난 뒤에 오랜만에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화선지와 붓을 사들고 종로길을 걸었습니다.

 

<강의 내용>

 

5년 전 라인 강가에서 만난 독일 녹색당 간부인 생태학자 ‘미카엘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럽과 독일의 녹색당과 생태학은 끝났다. 이제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녹색당이 일어나야 한다. 불교, 화엄불교와 선(禪)에 토대를 둔 변혁적 생명학으로부터!.’ 그때 자기들은 그것을 계기로 큰 자기비판을 통해 거듭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끝났다’는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결론일까요.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일어나야한다는 녹색당의 그 변혁적 생명학은 불교, 화엄불교와 선의 그 무엇에 중심근거를 둔 새 학문이란 말인가요.
오늘 강의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선 생태학이란 무엇인가? 19세기 독일사람 ‘헤켈’에 의해 시작된 자연생태에 관한 철저한 객관적 관찰체계로서 당연히 하나의 유물론입니다.


녹색당식 생태학은 끝났다


생명학이란 무엇인가? 바로 그 생태학의 객관적 관찰체계와 그 생태물질 내면에 숨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마음’과의 여러 상관관계에 대한 학문적 접근으로서 다분히 불교적입니다. 생태학과 생명학 사이의 비교 속에서 오늘 주제에의 접근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유럽과 독일의 녹색당과 생태학이 ‘끝났다’는 독일 녹색당의 결론을 말했습니다. 이 ‘끝’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저는 ‘미카엘 데이비스’의 이 ‘끝’이란 말의 출처를 지난 5년 동안 집요하게 추적해왔습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마음’.


생태물질 내면의 숨은 차원인 이 ‘마음’이 현실적으로 크게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유럽 전체와 녹색당 내부로부터 까지 아무런 노력도 고민도 하지 않았다는 극심한 질타를 받아온 유럽 및 독일 녹색당과 생태학 자신이 사실은 그 사이 10여년간 집권해온, 예컨대 독일 정치의 경우, 사민(社民)과 기민(基民) 양당의 이른바 ‘환경’ 즉 생태정책집행전문가 집단의 지속적인 정책시행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엄격하고 치밀한 과학적 생태 아젠다들이 참으로 허무하게 무기력 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똑똑히 보아왔던 것입니다.


예컨대 라인강의 ‘물고기와 수초와 수질’들이 자기네 아젠다를 투입했을 때 처음 5∼6개월은 효과를 드러내지만 그 뒤엔 반드시 예외 없이 매번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을 똑똑히 보아온 것입니다. 녹색만 아니라 사민·기민의 생태학자 전원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함구령으로 보안 한 채 내린 결론이 바로 그 ‘끝’이란 말입니다. ‘마음’. 생태물질 내면의 숨은 차원인,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바로 그 ‘마음’이란 이름의 기능이 현실적으로 크게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바로 그 말입니다. 유럽 근현대 과학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럽문화 일반에서의 이른바 ‘영성고갈’이란 바로 이같은 ‘속수무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데 우리에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 현 정권의 이른바 ‘4대강’ 문제입니다. 저는 꼭 네 차례나 공개적으로 거듭 현 정권의 ‘대운하’ 또는 ‘4대강’을 만류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 똥고집으로 그것을 강행했고 우격다짐 날림공사로 그것을 다 끝냈습니다. 성공했습니까? 구제역 파동으로 인한 침출수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고 이것을 빌미로 하여 그들은 또다시 무수한 ‘중소댐’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합니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그들로부터 고개를 완전히 돌려 버린지 오래지만 한 강가에 사는 늙은 어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고기가 살 수 없게 만들었다.’
물고기가 살 수 없게 만들었다는 어부의 이 말은 수초(水草)도 수질(水質)도 다 위험하다는 바로 그 말입니다. 나아가 강기슭의 농업일반과 지류(支流)들의 여러 가지 문제, 또한 식수(食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실질적인 적신호입니다. 그 모두가 단순한 물질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마음’이란 이름의 ‘우주생명의 빛(ASTRAL RAY)’ 때문입니다.


오늘 강의의 주제 바로 그것입니다.


선거전 대운하 논의 당시부터도 한마디 없던 좌파야당이, 제가 하루는 ‘4대강 비판’을 공개적으로 꺼내자 슬그머니 천주교, 기독교와 수경 스님의 불교세력에 빌붙어 마치 저희가 애당초부터 반대해온 것 마냥 가장하고 나서서 마구 떠들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쪽의 반대초점과는 달리 주로 ‘예산’이니 ‘관행’ 따위에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즉 ‘물고기, 수초, 수질’ 속의 바로 그 문제인 ‘물질속의 마음’, 그로인한 인간생명과 건강, 농업과 식수 등에 관해 그들이 단 한 치라도 관심이 있었던가요?


그들 전부가 일체 판단에서 철저한 ‘유럽저질 짝퉁’입니다. 이미 5년 전 라인 강가에서의 ‘미카엘 데이비스’와의 담화인 그 ‘끝’ 이야기를 분명 3∼4년 전에 ‘법보신문’에 일단 공개했음에도 하등 관심 따위가 없었던 그들입니다. 하기야 ‘유물론, 변증법, 실증주의’ 따위로는 ‘변혁적 생명학’의 근처에도 아예 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그들 자칭 좌파가 현 정권이 그 요란한 ‘보’들, 그 유치한 ‘댐’들과 이중보, 다리들과 수중장치들을 으스대며 공개하고 자랑해대기 시작하자 일시에 그 반대 표현과 액션을 제 아가리 속으로 쏙 집어넣어버렸다는 점입니다. 만족한 것인가요? 심지어 이때 천주교, 기독교의 그 치열한 ‘생명, 평화’ 운동 역시 ‘쏙’ 소리를 내며 속으로 ‘폭’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보’와 ‘준설’과 ‘다리’와 ‘수중장치’들과 일직선의 강물토건업 성과에 몽땅 감동해버린 것인가요?
‘물고기, 수초, 수질’과 그로인한 건강, 식수, 생명, 농업에 일대 오염과 파탄이 오게 되는 바로 그 ‘마음’ 문제는 아예 생각도 않고 쇠로 만든 다리, 몇 미터 깊이로 으스대며 파내린 준설효과, 애들 장난 같은 보, 이중보, 거기에 ‘일직선’으로 콘크리트 라인을 따라 기계적으로 뻗은 곧바른 물줄기에 세상모르는 순 촌것들 모양 홀랑 반해버린 것인가요?


권력유혹에 막혀 죽은 강 외면


그런 것들이 곧 4대강의 생태핵심인 생명, 그 생명의 주인인 ‘마음’의 모습이던가요? 여기에 하나의 암시적 해답을 제게 준 사람이 바로 수경 스님입니다. ‘권력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권력 추구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즉각 후퇴한다’는 스님의 ‘환계(還戒)’ 사유는 저에게 참으로 커다란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으로 가는 깨달음의 길, 부처님의 오솔길을 가로막은 시커먼 오염, 그것은 바로 ‘권력추구의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아닌가요?


얼마 전 미국 지구환경연구소 ‘레스터 브라운’ 소장이 방한했습니다. 그는 제가 만나본 서구 생태학자 중 가장 우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스터 브라운’은 바로 이 ‘4대강’과 ‘4대강 저지운동 전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간단합니다. ‘×’.


한 글자 뿐입니다. 왜 이 사람의 반응이 중요할까요? 그가 ‘미카엘 데이비스’와 똑 같은 서양의 양식 있는 ‘녹색 생태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좌우 여야와 서양 종교 쪽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중도(中道)’를 자처하는 왈, ‘생명평화운동파들’ 이야기는 어떤가요?


이른바 ‘환경운동’. 저는 여러 번 ‘환경’ ‘친환경’ ‘녹색성장’ 따위 명칭이나 슬로건이 돼먹지 못한, 전혀 잘못된 개념임을 강조해왔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언어를 잘못 쓰면 사고 자체와 그 사고에 입각한 행동이나 삶이 전혀 잘못됩니다. ‘환경운동연합’이 자기 사무실 벽에 ‘환경은 생명이다’란 현수막을 붙여놓는다고 해결될 문제일까요? 지금 우리는 생태학만 가지고도 이 문제 해결이 안된다는 지점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절은 ‘개벽을 통해서 대화엄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곧 ‘여성과 아기들과 못난이들 중심의 모심’ 즉 ‘우주생명학의 실천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다름 아닌 ‘불교, 화엄불교와 선’에 토대를 둡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불교생태학 총서 1권 ‘불교생태학(김종욱 지음)’ 29페이지의 하단에 “생태계의 문제는 자원의 고갈이라는 ‘유용성’의 측면이나 자연의 보호라는 ‘환경친화적’ 당위의 논리와 같은 ‘표피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되기 어렵다. 오히려 그것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서는 현대인의 사고방식 밑에 놓인 실체적 분리와 일방적 지배의 논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며 이런 분별과 지배와 집착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야 말로 불교의 뛰어난 효능이다.”라고 했습니다.


생태학(ecology)이란 생태계의 본질로서의 ‘상호의존성’입니다. 불교식 표현으로는 이것이 바로 ‘연연(緣起)’이고 뭇생태계의 바로 이 연기하는 존재 자체가 곧 ‘중생’입니다. ‘중생(衆生)’이란 ‘중연화합생기(衆緣和合生起)’의 준말입니다. 고로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헤켈’의 생태학 따위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이름의 ‘근대성’-사실은 바로 이것이 생명위기의 근원이고 문명대전환 요청의 원인이겠는데-도 불교의 ‘상호의존성[緣起]’의 길에서는 이미 난제(難題)가 못됩니다. 현대 생태학의 세 가지 경향, 복원생태학, 보존생태학, 경관생태학은 어찌 보아야 할까요?


불교 본래의 연기성, 상호의존성의 사유는 수천 년 전부터이고 서양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은 최근입니다. 따라서 후자에 의지하는 생태학은 곧 변혁적 생명학, 그리고 ‘불교, 화엄불교와 선’에 토대한 마음의 충격이 있을 때 더욱 불교영향력에 의해 자기를 변혁하게 될 것입니다. 보존생태학은 그 소극성, 그 근본적 포괄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근본에서 숙제를 하나 풀어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화엄경’입니다. 김탄허본 ‘신화엄경합론’ 제16권 ‘이세간품(離世間品)-입법계품(立法界品)’ 거의 전편을 통해 일관된 통절한 가르침에 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태계의 본질은 곧 ‘緣起’


‘우주생명의 문화 예술적 모심’.‘돈과 마음의 융합에 의한 새로운 경제제도’.


그리고 ‘서다림(逝多林)의 자책(自責)’이란 속칭이 붙은 ‘변혁적 생명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직계제자 7인이 제 개인적 해탈에만 만족해서 더 깊고 넓게 깨닫기를 멈춰버린 진리중의 진리, 즉 ‘자연생태계와 생명일반 속 어디에나 내재해서 언제나 활동하고 있는 부처님의 ‘자재신력(自在神力)’에 대한 일상적 깨달음의 결핍을 끊임없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바로 오늘 강의의 주제인 유럽 녹색당과 생태학의 그 ‘끝’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그리고 근원적인 ‘시작’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공부하지 않으면 ‘미카엘 데이비스’의 부탁은 ‘레스터 브라운’의 마야달력 해석과 4대강에 대한 ‘×’ 표식의 반응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넘어서는 서양과학과 문명의 한계를 꿰뚫어보고 넘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 경북도지사가 ‘경북의 살길은 양백간(兩白間)에 달렸다’고 한 그 말의 근거는 영주·봉화 사이의 산들 가운데 있는 한 낭떨어지 ‘초미(初眉)’의 새로운 가능성에 있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의 한 기인(奇人)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영주·봉화 사이 낭떨어지 ‘초미(初眉)’는 동해에서 해가 뜰 때 그 암벽 속에 숨은 수십 가지 광석들이 빛을 발하면서 반짝이고 기이한 음악이 울리며 또 기이한 기운을 내뿜어 주변에 깔린 독초(毒草), 독기(毒氣), 독수(毒水), 독충(毒蟲)과 온갖 오염·부패를 깨끗이 정화하고 치유한다.”


대구 매일신문 문화부는 11년 전 바로 이 구절에 도전했다고 합니다. 결과, 음악이 울렸다는 사실 이외엔 모든 것이 그대로임이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태백·소백간의 오염의 핵심은 ‘산화(酸化)작용’인데 이것을 정화·치유하는 ‘핵산(核酸)미립자’가 바로 ‘초미’의 암석 내부로부터 뿜어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연이 자연을, 생명이 생명을 스스로 정화·치유하는 일’이 이젠 약초나 약수나 나무뿌리만이 아니라 흙, 돌, 광석, 쇠붙이, 기운까지도 그러하다는 말이 아닐까요?


독일과 유럽의 경우, 녹색당과 생태학을 절망에 빠트린 바로 그 물질속의 ‘마음’이란 이름의 ‘부처님의 자재신력’이 이제 도리어 자연과 생명 스스로를 치유·정화하는 것입니다. 과학도 생명운동도 유기농운동과 문화예술도 사상도 다 바뀌어야 합니다. ‘환경’, ‘친환경’, ‘녹색성장’ 따위 헛 간판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녹색당, 동아시아의 새로운 녹색당.
이것 역시 재고되어야 합니다. ‘녹색’이 생명의 본성인가요? 생명의 한때 색깔 아닌가요? 더욱이 ‘마음’이 이제 그 여성적 특성을 중심으로 꼿꼿이 머리를 쳐드는 개벽을 지나 대화엄으로 나아갑니다. 그 모습은 곧 ‘모심’입니다. ‘녹색당’은 그 이름을 이제 무엇이라 바꿀까요?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이 강연은 1월14일 동산불교대학과 법보신문이 공동개최한 명사초청특강에서 강연한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김지하
1941년 2월 4일 전라남도 목포의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7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었으며 80년대에는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다. 2006년 10회 만해대상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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