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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 War(맹호부대)

"나의 월남전 참전수기" 병장 이상수 글

by 동파 2011.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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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과 한국***

카페에 수록된 병장 이상수의 글 "나의 월남전 참전 수기"를 읽었습니다.

같은 시기 참전했기에  오늘 내 블로그에 올립니다.

 

 

 

 

나의 월남전 참전수기 - 13.재구11중대1소대 구출작전  



나의 월남전 참전수기


병장  이  상  수

맹호 1연대 수색중대 2소대 무전병
(파월 1970. 6. 2. ~ 1971. 5. 28.)

현재 서울 금천구 시흥 거주
(☏ 017-345-7741)



13. 재구대대 11중대 1소대 구출작전 (1971. 3. 27. 10:00~19:00)

1971년 3월 27일.
이제 월남생활도 그럭저럭 10개월을 넘어 고참이 되었다.
할일도 별로 없고해서 1소대는 중대 연병장에서 배구를 하고 우리 2소대는
정문 위병소 뒤에있는 간이 사격장에서 사격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격연습이라지만 조준사격은 거의없고 지향사격내지는 그냥 허공에다 쏘아대는
그런사격 연습이다.



오전 9시 조금 넘어서 중대에 대기하고있던 차량에 '김영만'소대장이 탑승한 채
사격장으로 오며 소리친다.

“전원 차량에 탑승!”

영문도 모르는체 차량에 탑승하니 그때서야 '임한복' 중대장님의 작전지시가 하달된다.

“금일아침 재구대대 11중대 1소대가 630고지주변에서 월맹 정규군에게
완전포위돼 상당한 사상자가 났으니 수색중대 2소대하고 3소대(공수특전사 3개팀)가
출동하여 월맹군에게 포위된 11중대 2소대원을 구출하라”는 명령이다.

맹호 재구대대 11중대 전체가 수색정찰을 나갔다가 그중 1소대병력이 월맹정규군
아지트로 유인되어 완전포위되는 바람에  상당히 많은 아군 사상자가 났다는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중대장님의 지시에 따라
중대장을 중심으로 우리는 우측에 대열을 갖추고,
3소대 특전사는 좌측에 일렬 횡대로 대열을 갖춘다음, 한발한발 전진을 해 나아갔다.

조금 있으니 3소대 팀장으로부터 무전이 날아든다.

“중대장님 일렬횡대는 안됩니다.”

중대장님왈

“개소리말고 앞으로 전진!”

“횡대는 안됩니다.”

“전진하라면 해! 뭔 말이많아!”

무전기에 불이 날지경이다. 바로그때 맨좌측에서 전진을 하던 3소대 3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무전기로 흘러나온다.

“베트콩들이 좌측으로 돌고 있습니다”

그러자 우측에서 전진을 하던 '정인모'하사의 다급한 목소리

“베트공이 우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뒤를 노리는것 같습니다!”

말이 떨어지기무섭게 3팀장의 다급한 목소리

“부팀장 하중위가 맞았습니다!”

그러자 우측의 정인모하사의 목소리

“'김재훈'이가 맞았습니다!”

“위생병 불러!”

그래도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중대장에 목소리

“잔소리말고 앞으로 전진해!”

작전을 여러번 나가보고 적들과 교전도 여러번 해 봤지만 이번만큼은 쉽사리
교전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난 그래도 중대장님의 명령하달을 김영만소대장께 전달하면서
소대장과 손을잡다싶이하며 전진을 했다.

불과 200여미터정도 전진을 했을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여기저기서 위생병 부르는소리, 중대장, 소대장 찾는소리,
비명소리, 유탄발사기 터지는 소리, 흙먼지가 날고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중대장님에 목소리도 들려오질 않았다.
나는 조그맣게 패인곳이 있으면 무조건 엎드렸다.
그래도 그와중에도 무전은 받고 전달하고 보고를 해야하니
정말로 군인정신이 아니였으면 도저히 감당을 못했을 것이다.

몇시간이 흘렀는지 아니면 몇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더이상 전진은 안됩니다.”

“위생병을 보내라!”

“헬기를 불러라!”

무전기만 불이난다.

정신을차려 앞을보니 베트콩 몇 명이 야자수 나무밑으로 숨는게 보였다.

“소대장님 저기...”

하면서 나는 총을 쏘아댔다.

그러자 무전기 쇼트안테나가 움직이는게 포착됐는지 유탄발사기 한발이
머리맡에 날아와 터진다.

"쩌정~!!!"

귀가 째질거같다. 흙먼지를 고스란이 뒤집어쓰고 있는데 김영만 소대장이 내손을 잡고

“뒤로 물러서!”

몇발짝 뒤로 물러서 엎드렸는데 조금전에 엎드렸던 그 자리에 또 유탄발사기가
또 날아든다.

그러기를 서너차례, 이젠 무전이고 뭐고 없다.
본능적으로 조금 파진곳만 있으면 엎드리고 한발이라도 뒤로, 뒤로......

난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김영만 소대장님이 아니였으면 지금내가 살아 있을까? 하고.
미련스럽게 무전기는 왜 벗어버리질 못했는지........

날이 어두워지면서 후퇴가 비교적 쉬웠다.
뒤쪽에 약 2미터 정도되는 철조망이 있었는데 그 철조망을 모두 뛰어넘어
도랑으로 피신한후 인원파악에 들어갔다.

2소대에서 전사 1명(김재훈병장)에 부상4명(위생병,박종훈,신병 2명등)이 발생하고,
공수특전사 부팀장1명(하병렬중위) 박진우하사등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입은
크나큰 인명손실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때 그작전에 참여했던 전우들은 모두들 그 철조망을 어떻게 뛰어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들 했다.

그날 점심 저녁 모두 굶었는데도 밥생각은 전혀없다.
밤새 맹호60포병대대에서 날려주는 조명탄으로 위안 받으며 어둠속에서 우리는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날이 밝자마자 사단에서 긴급지원된 APC 장갑차를 앞세우고
어제 그 치열했던 현장으로 다시 진입을해서 죽은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전과도 확인해야했다.

수색중대원 전원이 전열을 가다듬어 수색에 막 들어가려는데 2분대장인
'강준모'하사가 소대장님께 한말씀 올린다.

“소대장님 전 몸이 불편한데 수색작전에 안나가면 안되겠습니까?”

소대장님께서 바로 받아치신다.

“강하사! 분대장이 안가면 분대원들은 누가 지휘하나?
잔말말고 어제 들어갔던 그지역에 다시가서 우리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해 와!”

살아남은 수색중대원 모두가 재차 수색을 벌려
수색중대원 1명, 특전사 장교포함 2명, 재구11중대 1소대원 19명,
베트공 시체 4구등 26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베트콩 시체는 한군데 땅을 파서 묻어주고,
우리 전우들은 3대대 베이스로 옮겨 새옷을 갈아입히고 의식을 치른 다음
시체 한구 한구씩 비닐머드백 관에 입관시킨 다음 추럭에 옮겨 실었다.

그들이 3대대 베이스를 떠날때 우리는 부대정문까지 양쪽으로 늘어서서
어깨총을 한다음, 조총사격속에 그들을 떠나 보냈다.

내가 월남전에 오고나서 겪은 최대의 전투였다.

재구 11중대 1소대에서 포위됐다가 구출되어 유일하게 지금 생존해서
제주도에 살고있는 '박창만' 병장의 증언을 통해 그 전투 실상을 '백용구'하사의
체험수기에서도 볼수 있다.

다음은 '백용구'하사(당시 맹호1연대 재구대대 11중대 2소대 1분대장)의 수기내용중
'박창만' 전우가 겪은 체험수기 일부를 옮겨 적은 것이다.



우리는 적에게 유인되어 적의 매복 진지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었다.
무전병이 무전을 보내는 순간, 적의 총탄에 쓰러져 버렸다.
선임하사도 쓰러졌다. 무전병은 얼굴에 총을 맞고 뛰고 있었다.
1분대장은 총을 쏠 생각은 않고 대원들을 위해 기도하다 총에 맞아 죽었다.

우리 분대장은 얼굴을 처박은채 엉뚱하게 야자수나무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강창순' 전우가 목에 총을 맞고

"물, 물, 물...."

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덮어주고
적에게 계속 사격을 하였다.

총알이 나에게 집중되자 마치 서부영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속 방아쇠를 당겼는데 결국 실탄이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고국에 두고온 처자식 생각이 나며 눈물이 흘렀다.
적이 던진 수류탄이 내게 날아오길래 즉시 일어나서 뛰었는데
그만 중대원들의 시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적이 확인사살을 하기위하여 나에게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심코

"정녀야!~"

하며 딸의 이름을 부르는데 베트콩이 나의 머리에 대고 쏜 총탄이 기적적으로
머리에 맞지 않고 내 왼쪽 어깨를 관통하였다.

이때 우군의 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옷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대신 아군의 포탄이 폭발하며 날아온 먼지가 잔뜩 몸을 덮고 있었다.
내가 일어서자 베트콩들은 내가 베트콩인줄 알고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그때 또다시 포탄이 떨어졌고, 나는 그틈을 이용해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한참 뛰다보니 아군의 철모가 보였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내가 다시 눈을 뜬곳은 병원에서였다.

보안대장하고 간호 장교가 와서 오늘 일을 상세히 설명하라고 했다.
나는 첫마디에

"다 죽었습니다.털보 중대장만 있었으면 이렇게 몰살당하지 않았을겁니다"

라고 말했다. 간호 장교는

"털보 중대장이 누구죠?"

라며 보안대장에게 물었다.
그는 귀국한 전임 중대장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보안대장에게  

"베트콩들이 얼룩무늬 옷을 입고, 한국말로 떠드는것을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보안대장은

"그들은 이북에서 3년간 훈련을 받고 온 월맹정규군 특수부대야.
그들은 11중대를 몰살시키고, 털보 중대장을 납치하려 했어. 자네 중대장은
현상금이 붙은 사나이였어"

라고 말했다.




한국군은 곧 월맹군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김학원' 사단장까지 현장에 나와서
연대급 작전을 개시 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대를 포위하고 작전을 전개했으나 적의 B40 공격에 아군 장갑차들만 피해를 입었다.

그날 밤 월맹군 약 200명은 한국군 포위망을 뚫고 '다우보이'산으로 유유히 철수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작전에 실패한 당시맹호1연대 11중대장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불명예 제대를 했고, 대대장은 보직해임되는 불행을 당했다고
훗날 '백용구'하사는 증언해 준다.

당시 월남전 정보부대에서 근무하다 귀국한 '김민택' 대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한다.

그날의 사건이 있은뒤에 당시 작전을 지휘한 월맹군 대대장의 전령이 생포되었는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월맹군 10특공대대장은 당시 11중대장 김진선 대위를 죽이려고
최후의 결전을 시도한 것이었다고 한다.

작전을 지휘한 월맹군 대대장은 그 공으로 소령에서 중령으로 특진했다고 한다.

그 작전에서 죽은 시체의 군복까지 벗기면서 한국군의 신분을 상세히 확인했으나
'김진선'대위를 죽이지 못해 무척 아쉬워 했다는것이다.



좌에서 두번째가 2소대1분대장 '백용구'하사, 맨우측이 1소대1분대장 '윤병하'하사

좌우지간 재구 11중대1소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무전병을 비롯해서
지금 부천에 살고있는 '윤병하'하사 및 제주도에 살고있는 박창만 병장등
10여명만이 살아남는 그야말로 생각조차 하기싫은 그런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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