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서울 정릉 보국사. 체감 온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건만 삭발한 그의 머리에선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100배, 200배, 300배…. 낮은 염불소리와 함께 계속되는 그의 절은 1000배를 넘어, 2000배, 3000배, 4000배로 향한다. 그의 옷이 땀으로 흥건해질 무렵 법당 밖에선 어느새 겨울의 긴 어둠이 시작되고 있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이자 불력회를 이끌고 있는 박종린(54) 법사. 그는 지난해 말 깊은 번민에 빠졌다. 불교계 어른으로 한 평생 경전번역의 길을 걸어온 역경원장 월운 스님이 동국대의 일방적 통고로 해임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설마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박 법사는 학교 측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중에는 분심까지 일었다. 법을 경시하다 못해 법의 당간을 무너뜨린 행위로 비춰졌다. 학교 책임자와 이사들을 원망하는 마음도 벌컥벌컥 올라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경전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끝이 없다고. 원망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거둬들여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박 법사는 이번 사태 또한 몇몇 사람의 잘못이기에 앞서 이런 풍토가 조성되도록 방관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돌연 가슴이 저려오고 눈물이 솟구쳤다.
박 법사는 참회정진 할 것을 결심했다. 21일간 8만4천배 정진을 다짐한 박 법사는 미리 5일간의 긴 휴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12월 31일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다. 꼭 30년만의 삭발이었다.
1979년 5월, 당시 스물넷의 박 법사는 남해 보리암에서 삭발한 후 21일간 8만4000배 정진기도를 했었다. 군대 가서도 부처님 잊지 않고 살기를, 또 편찮으신 어머니가 완쾌되기를 발원하면서 절하고 또 절했었다. 당시 8만4000배 정진기도는 훗날 그로 하여금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를 가도록 했으며, 동국역경원에서 경전과 더불어 25년의 세월을 살도록 했다.
그렇게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다시 삭발한 것이다. 거울 속에는 마른 중년의 남성이 낯설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날 밤 대구에서 밤새 철야정진을 한 그는 1월 1일 새벽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곧장 향한 곳이 초대 역경원장 운허 스님의 원력이 서려 있는 남양주 봉선사였다. 그곳 법당에서 종일 절하며 새해 첫날을 보낸 박 법사는 다음 날인 2일 동국대 정각원, 3일 서울 조계사, 4일 부천 석왕사, 5일 정릉 경국사, 6일 강남 봉은사, 7일 정릉 보국사에서 한 배 한 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성껏 4천배를 올렸다.
이들 절은 역대 역경원장 스님과 인연이 닿았던 곳이거나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스님, 동국대 이사장 직무대행 스님 등이 상주하는 도량이기도 했다. 박 법사는 부처님 말씀을 이 시대의 언어로 바꾸는 역경불사가 원만히 이뤄져 8만4천 법문이 대중의 지친 가슴들에 등불처럼 비춰질 수 있기를 정성껏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법이 무너진 중심에 바로 제가 있었습니다. 남 탓하고 원망하길 좋아하는 제 어리석음이 있었고, 이렇게 좋은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펴지 않았던 제 게으름이 있었습니다. 또한 재가불자로서 승가를 제대로 외호하지 못한 저의 나약함이 있었고, 법이 아님을 알고도 애써 외면했던 저의 비겁함이 있었습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참회하고 또 참회할 따름입니다.”
박 법사는 “한국불교가 발전하지 않고서는 동국대가 명문이 될 수 없고 동국대가 명문이 되지 않고서는 한국불교가 발전하기 어렵다”며 “진정한 변화는 마음이나 깨달음 등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 몸과 내 주변 현실에 대한 자각과 참회로부터 시작됨을 알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 법사는 휴가가 끝나는 1월 12일부터 1월 21일 회향할 때까지 서울 안암동 보타사에서 출퇴근하며 아침저녁으로 4000배 정진을 계속할 예정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