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牛 통해 깨친 본래진면목 일화 감동
화합이선(和合二仙) 한산·습득 도반 우정 나눠 지음지기(知音知己) 모이는 풍류명소
한산사
국청사(國淸寺) 경내에는 다른 사찰에서 보기 힘든 기이한 풍경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경내에 소들이 자유자재로 출입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 소들은 원래 국청사에 속한 농경지를 경작하기 위해 경내에서 기른 것으로 알려지지만 근대에
중국이 공산화가 되어 토지가 국유화가 되었을 때도 변함 없이 경내에서 소를 길렀다고 하니 단순히 경작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또 다른 사연이
전해오기 때문이라 한다. 즉, 당(唐) 나라 때 국청사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던 습득(拾得)이 국청사 부근에서 소를 몰고 다녔는데, 하루는 법당
문에 기대어 스님이 대중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것을 듣고는 말하길 “흥! 한가하게 머리를 맞대고 뭐하고 있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놀란 상좌스님이 “미치광이 처사가 무슨 일로 무상법문을 방해하는가?”라고 했다. 습득이 손을 어루만지면서 깔깔대고
웃으면서 말하길 “당신들은 지금 내가 몰고 다니고 있는 이 소들을 몰라보겠는가? 이 소들도 본디 당신들 같은 화상 출신으로 공짜 시주 밥을 먹고
요란법석 거드름을 피우더니 이 꼴이 되었다네!”하고는, 몰던 소들을 가리키면서 과거에 원적했던 한 유명한 스님의 명호를 부르니 과연 한 소가
‘음매’하면서 앞으로 나와 서글픈 눈빛으로 스님과 대중들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스님들의 명호도 거명하니
그 때마다 한 마리씩 ‘음매’ 하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에 모골이 송연해진 스님들과 대중들이 습득은 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 후부터 경내에 소들이 출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고사는 전설이지만 불가에서 목우(牧牛)나 심우(尋牛)을
통해 ‘본래 진면목’을 찾으려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그리 황당무계한 일로 치부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다시 한번
국청사 경내에 출입하는 소들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습득과 한산이 국청사에서 소주(蘇州)의 한산사(寒山寺)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그 내막은 이렇다. 즉, 월주(越州)에 살던 왕(汪)씨 성을 지닌 과부가 부용(芙蓉)이라는 딸 하나를
데리고 국청사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임종 전에 딸에게 당부하기를 “스님들과 결혼을 할 수 없으니 한산과 습득 처사 중에 한 분을 선택하여
평생을 의탁하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이에 부용은 한산과 습득과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습득을
점찍어두고 은근한 정을 주고 있었다. 어느 날 한산이 습득의 거처를 지나가다가 부용과 습득이 서로 정겹게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엿듣고는
한탄하면서 앞마당에다 “서로 불러 맑은 강속에 핀 부용을 따려 했다네. 즐거운 놀이에 해 저문 줄 모르다가 거친 바람에 일렁이게 되었다네.
원앙새는 물결 따라 흘러내리고, 계척새는 물굽이에 흔들려 노는 법이네. 내 이제 배에 맡겨 노질을 그치고 하니, 무언가 호탕한 정(情) 거둘 길
없다네”라는 알쏭달쏭한 시 한 수를 적어두고, 소주(蘇州)의 한 사찰로 출가해 버렸다. 나중에 습득은 마당에 써 놓은 시를
보고 한산이 자신과 부용의 결합을 바라고 국청사를 떠난 것을 알고는 부용과 남매지간의 의리만 맺고 한산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얼마 후, 습득은 천신만고 끝에 소주의 한 사찰에서 한산과 비슷한 사람이 출가했음을 알아냈는데, 불현듯 한산이 국청사
앞마당에 써놓은 시 구절이 생각나 부근 강에서 부용처럼 예쁜 연꽃인 ‘하(荷)’ 한 잎을 따 가지고 찾아갔고, 한산은 먼 길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온 습득을 위해 도시락인 ‘합(盒)’ 하나를 마련해서 상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처사는 다시 예전처럼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한 도반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세간에선 당시 이들 다정한 모습을 보고 ‘화합이성(和合二聖)’, ‘화합이선(和合二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까닭은 중국어로 한산이 들고 나온 도시락인 ‘합(盒)’자는 ‘화(和)’자와 습득이 들고 온 연꽃인 ‘하(荷)’자는 ‘합(合)’자와
같은 음이기 때문이라 하는데, 지금까지도 남녀지간이나 친구, 친척끼리 서로 진심으로 화합을 기원할 때면 이들의 고사를 떠올리고 소원을 빌고
있다. 당시 이들이 상봉했던 곳은 남북조 시대인 양(梁) 나라 때에 세워진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란 사찰로 남북으로
운하가 연결되는 고소성(姑蘇城)의 강교(江橋)와 풍교(楓橋) 앞에 자리잡고 있다. 세간에선 한산이 한동안 거주했다고 하여 한산사(寒山寺)로 더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 사찰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당시에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한산사 부근에
머물렀던 장계(張繼)라는 백면서생이 “자신은 한산과 습득처럼 세상에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다”고 신세타령하 남긴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
한 수 때문이다.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하늘에선 서리 마저 내리는데,
강풍교의 깜박이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잔다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야밤에 울리는 종소리만
나그네 탄 배를 닿는다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그러나 이 시로 말미암아 그토록 궁색했던 장계도 만인들의 동정을 얻어 일약 당대에서
제일 유명한 시인의 반열에 올라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고, 또 한산사는 더욱 ‘지음지기(知音知己)’들이 모이는 명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부득이 한산의 남긴 시 한 구절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샘물 떨어지는 소리처럼 백금(伯琴)을 살짝 퉁겨도,
자기(子期)가 있다면, 그 소리 금방 알 수 있다네.”
여행칼럼리스트 김영진 oky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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