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찔레꽃
송이환
시야가 넓게 트인 명도암 가족 공동묘지, 시원한 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팔랑인다.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아내와 다급히 달려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버지 옆에 모셔놓고, 여태껏 무관심하게 살아온 지난 삶이 울컥 되살아난다.
봄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한라산 들녘에는 짝을 찾는 꿩과 노루의 울음소리로 온 세상이
야단법석이다. 이때 찔레꽃은 절정을 이룬다. 아리따운 신부의 부케인가.
순수하면서도 청초한 아름다움, 거기에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나르는 벌과 나비들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 다름없다.
4·3은 찔레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 아버지 나이 서른다섯. ‘곧 온다’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겁에 질린 여자. 그것을 보며 불안에 떨던 올망졸망한 아이들. 갓 돌을 넘긴 아이
하나가 자유로운 삶을 박탈한다는 빨간 찔레꽃 꽃잎 하나가 등에 붙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엄마의 등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허기진 시절 아이들에게 단연 인기인 것이 ‘삥이’이다. 뒷산에 올라가 삥이를 뽑고,
고사리를 꺾어 들나물로 한 보따리 가득 담아 돌아올 때면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기 마련.
이때 밭담 사이로 우뚝 솟아난 찔레순은 훌륭한 구원투수였다, 몸에 가시가 있어 찔려 아프지만
굵게 잘 뻗은 어린 순을 껍질 벗겨 살짝 까서 먹어보면 달짝지근함과 풋풋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소주 한잔을 부모님 전에 올리고 무릎을 꿇어 절을 한 후, 무덤 주위에 난 잡풀을 뽑다
그만 가시에 손을 찔리고 말았다. 예전에 없던 찔레가 일가를 이루며 단출하게 살고있는
것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따끔거리는 손, 손가락 하나가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붉은 찔레꽃이다.
어머니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벵작으로 농사를 혼자 지었으며, 남자들도 힘든, 깊은 숲 고지高地에 들어가 땔감 나무, 숯 등을
해다가 등짐으로 날라다 팔았다. 때론, 밀주密酒를 몰래 만들어 팔기도 했었다.
통행하는 사람을 일일이 검문하던 때다. 어머니의 어떤 힘이 그런 위험을 감내하도록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삶을 어머니는 사셨다.
그렇게 힘든 삶에서도 찔레꽃은 온천지에 하얗게 피어났다.
5월이 되면 내 고향 신촌 들녘 어디에서나
하얗게 피어나는 찔레꽃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 꽃피우던 시절
허기진 목마름에 한 줄기 빛이던 순박한 꽃 찔레꽃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고뇌를 안고
강처럼 흘러버린 그 세월 반추하며
내 고향 찾아 불원천리 찾아왔건만
꿈에도 그리던 찔레는 간 곳이 없네
척박한 절해의 고도에서
네 개의 어린 꽃망울 벗 삼아
삼베적삼 기워입고 호밋자루 다 닳도록
흙에 묻혀 살던 찔레꽃
막 겨울이 지날 무렵
산길에 쓰러진 한 맺힌 찔레의 넋은
험난한 세상 함께한 아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가시덤불 속에서 슬프도록 하얀 꽃으로 피어나네
나는 ‘자식’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60여 년 세월 동안 내리사랑을 받을 줄만 알았지,
한 번도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처럼 늘 마음에 달고 살던 네 개의 짐을 편히 한번 내려놓지 못한 채,
들녘에 모질게 피어난 찔레꽃. 차디찬 맨땅에 몸을 누이고 있으면서도 5월이면 하얀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는 정성이 눈물겹다.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 내 어찌 다 용서받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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