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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 속으로 들어가다
제주일보 2021년12월24일
금요에세이
문 선 일 / 수필가
거실에 걸려있는 수묵화 한 점. 우
리와 함께 한 지도 거의 25년 된 남도
(南島) 화백의 그림이다. 원경 중앙에
헤엄치는 고래가 꼬리를 살짝 물위
로 내어놓은 듯, 작은 섬을 달고 있는
서귀포앞 바다에 떠 있는 문섬 그림.
먹물을 머금은 붓의 활달한 움직임
으로 의연한 문섬을 먹빛으로만 그
려내고 있다. 근경에는 제주 해안의
바위들의 거친 곡선은 동적인 생동
감, 밑으로 펼쳐진 밭들의 소박한 모
습이 한가롭게 펼쳐졌다.
좌측 중경에 떠나가는 배 한척. 어
디로 가는 것일까. 먹의 농담만으로
담백하게 표현한 문섬의 풍경에 저
떠나가는 배 한 척이 없다면 뭔가 좀
허전할 것 같다. 화백이 앉아서 문섬
을 그렸을 그 자리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지만 늘 벼르고만 있었다. 찾을
수 있을까.
초봄의 외출. 좀 이른 아침이어서 일
까? 공기가 상큼하다. 서귀포 버스정류
장에 도착하니, 50년 지기 S가 나를 향
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4년 반
동안 근무했던 학교. 결혼 후 처음으로
마련해 살았던 언덕 위의 작은 집, 그리
고 문섬을 가까이 보고 싶었다.
친구와 둘이서 걸매생태공원 깊숙
히 들어가니 매화꽃이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봄 햇살 아래 방
금 터트린 연분홍 매화. 봄은 봄이었
다. 매화는 갓 스물 넘은 수줍은 처녀
처럼 청초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
다. 한 시간 버스타고 나오면 이렇게
멋진 낙원이 날 기다리고 있는데, 겨
울 내내 집안에서만 있었다니….
매화꽃 향기 흠흠 맡으며 꽃그늘에
서 오래 머물렀다. 친구의 잔잔한 미소
도 꽃처럼 예뻤다. 갑작스레 함께 걷자
는 나의 청에 만사 제처 놓고 시간 내
준 S. 다정다감한 그녀는 삶을 포용하
여 욕심 내려놓고 봉사하며, 건강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듯 보였다.
떠나가는 배.
남도 화백의 작품 산수풍경화에
늘 등장하는 작은 배 한척. 한줄기 수
증기를 날리며 물살을 가르고 나아
가는 그 배는 언제나 섬에서 출발하
여 바다 저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화
백은 떠나가는 배 한척을 그림 밖으
로 항해하는 동선으로 여백의 공간
이 액자 틀 밖으로 넘어서고 있다. 섬
과 세계를 연결하는 화가의 이상향
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누군가의 감
상평에 공감이 갔다.
2019년 3월. 한국화가 남도 부현일
작가의 작품이 제주문화예술제단의
제주원로예술가 지원사업으로, 남도
화백의 회고도록인 부현일 작품집이
발간되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곳곳에 소장된 남도의 작품은 제주
인으로 고향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그려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집으로 나마 그 분의 작품을 감상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문섬 작품 설명에 S는 화백이 그린
곳을 꼭 찾아주겠다며 새섬으로 가
자고 했다. 칠십리 공원을 천천히 내
려와, 언제 보아도 멋스러운 새연교
를 건너니 바로 새섬 공원이었다. 새
섬에 들어서니 문섬이 어느 새 바싹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문섬을 바라
보며 섬 둘레를 반쯤 돌았을 즈음 눈
에 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나도 모르
게 발걸음이 멈춰 섰다.
“우와, 여긴 것 같아. 여기서 저 문
섬을 그리신 거야.”
호수의 수면과 같은 잔잔한 바다.
자리를 잡아 앉아 한참 동안 문섬을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던 곳. 어디쯤에 이젤을
세웠을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
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이런 제
주 해안가를 찾아다니며 보다 생동
감있는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 현장
사생을 고집하신 분, 제주 해안의 아
름다운 산수풍경을 예술로 승화 시
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 쏟은 분이다.
이제 남도의 작품집 들고 제주 곳곳
의 해안, 남도 작품의 고향을 찾아 순
례 길을 떠나 봄은 어떨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다 문득 눈
을 들어보니, 문섬 앞에 작은 배 한
척. 실제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놀랍고 신기했다. 내 거실 문섬
그림 속에 등장한 배가 거기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림과 현실의 겹쳐지는
순간의 놀라움. 나는 잠시 말을 잃었
다. 나는 거실의 걸려있는 작품 속으
로 들어온 것 같았다. 수묵화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수묵화 속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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