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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김길웅 칼럼니스트
지난 두 해의 겨울은 힘들고 지루했다.
괴질로 사람들의 관계가 헐거웠다.
께름칙해 아예 만나지 않은 상식 일탈, 그게 일상이 돼 겨우내 우울했다.
너와 나의 단절로 삶의 지형이 축소되고 소통의 언사도 뜸했다.
시간 속에 혼자였다. 사람 사이 드나듦이 없으면 절해고도가 된다.
섬은 단절의 땅이다. 밤낮 파돗소리가 적막을 키울 뿐, 바람결에 귀
기울여도 와 닿는 한 가닥 기별이 없다.
헛헛한 고립무원의 공간, 그동안 다들 섬으로 외로웠다.
물결이 찰랑거려도 하 수상한 시국에 가슴 쓸어내리던 불안의 날들.
코로나19가 오미크론에 이르면서 마침내 변곡점을 찍는 것 같다.
질병에게 염치를 바라랴만 이쯤에서 제풀에 끝날 법도하다.
힘에 겨우면 내려놓는 게 상리(常理)다.
이 녀석이 독감 같은 풍토병이 돼 가는 건 아닌가.
다시 봄. 기지개 켜는 소리로 들썩인다.
‘깨어나자’, 발길 끊어진 가게를 지키던 저자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불 끄고 문 닫았던 가게에서 듬성듬성 들려오는 사람들 웃음소리.
아직 봄의 들머리인데도, 좌판 벌이고 나앉은 등 굽은 할머니 어깨 위로
내려앉는 여린 햇볕이 따사롭다.
어느 시골집 모퉁이에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본 게 1월
중순이었다. 그 후로 강풍에 자국눈 내렸으니, 먼 데서 내려오던 봄이
신발 들메던 무렵이었다. 생각지 않은 개화에 설렜다.
그래서 설중매인가. 이런 경이로움에 우리의 삶은 단조롭지 않다.
매화에서 옛 선비의 절개를 기리니, 꽃이 더더욱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 아닌가.
아파트 뜰 늙은 왕벚나무 아래 앉아 귓속으로 스미는 웬 소리에 귀 기울인다.
잎 하나 없이 발가벗은 채 겨울바람 앞에 선 나무의 밑동에서 가지로 물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가는귀먹은 데시벨에도 들린다. 심층에 내리뻗은 뿌리에서
굵은 줄기를 타고 가지로, 잔가지 끝으로 줄기차게 물 퍼 올리는 소리.
겨우내 숲에 숨었던 직박구리 한 쌍 가지 끝에 앉아 거친 울음을 터트린다.
겨우내 쌓였던 울분이라도 토악질해대는가. 각진 그대로 깨어지는 파열음이다.
몇 걸음 내딛다 어른거리는 그늘에 눈 치켜보니,
처진 목련 나뭇가지에도 꽃망울이 도톰하게 살 돋았다.
며칠 후면 벙글겠다. 젊은 여인이 반려견을 데리고 지나간다.
흰털이 어느새 기운으로 무성한 녀석이다. 목줄 팽팽히 당기며 종종걸음치는
게 예사롭지 않다. 무심한 주인더러 ‘동네 어귀에 봄이 내려왔으니,
봄 마중 가요.’ 하는 몸짓언어 같다.
그나저나 아파트에 반려견을 데리고 사느라 수고롭겠다.
실눈을 하고 나무 아래 눈을 주니, 숱한 잡풀이 잎눈을 내밀고 있다.
처음 내놓은 서너 장 잎새들이 귀엽다.
겨우내 땅속 깊이 숨었다 움을 틔웠으리. 잡풀이라 하나 싹을 미워하랴.
참 앙증맞다. 생명으로 돋아났으니 존엄한 것 아닌가, 한참 눈으로 어루만진다.
읍내에 살며 절물자연휴양림에 자주 갔었다.
어느 초겨울, 무심결에 복수초 그 노란 꽃과의 해후,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전율로 남아있다. 눈 하얗게 덮인 차가운 땅을 뚫고 나와 함초롬히 선연하게도
눈 깜빡이던 꽃의 자태. 봄의 전령은 여느 꽃과 달리 봄을 알린다는 소명 하나
실현하려 추위쯤 견뎌낸다는 걸, 그때 알았다.
걸음이 불편해 엄두를 못 낸 채 마음만 내왕한다.
다시 봄.
새잎 돋아난 연둣빛 들판을 지치게 걷고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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