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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사찰

존자암(尊者庵)은 어디에

by 동파 2021.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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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라산 영실(靈室) 존자암(尊者庵)

 

존자암은 어디에

제주일보
2021.08.04

오상학, 제주대학교 지리교육전공 교수·박물관장/논설위원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제주 정의현에 유배되었던 당대의 명문장가 홍유손(洪裕孫)의
『소총유고(篠䕺遺稿)』에 수록된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은 존자암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자세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받아왔다.
특히 존자암의 지형 지세를 풍수적 관점에서 풀어낸 것은 존자암의 위치를 비정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홍유손은 존자암의 풍수적 형세를 사신사(四神砂)가 잘 갖춰진 훌륭한
명당으로 평가했는데, 지금의 존자암지의 형세를 홍유손의 기록과 비교하면 거의 들어맞는다.

이러한 명당 구조를 지닌 볼래오름의 존자암지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제주 불교의 발원지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추정은 홍유손의 「존자암개구유인문」에서 “존자라는 이름의 암자가 만들어진 것은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설 때였다.”라고 하는 문장과 『대장경』 법주기의 제6존자 발타라가
아라한과 함께 살았다는 탐몰라주(耽沒羅洲)를 제주도에 비정한 것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
러나 1990년대 이후 몇 차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이를 입증할 만한 유적이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고 출토된 유물로 보아 볼래오름의 존자암은 1380년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기록에서는 존자암의 원래 자리가 볼래오름의 존자암지가 아니고 영실이라고 한다.
존자암에 대한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이는데,
“존자암은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 골짜기에 돌이 마치 승(僧)이 도를 닦는
모습이라서 수행동(修行洞)이라 불렀다.”라고 기술했다. 1653년 간행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존자암이 과거에는 한라산 영실에 있었으나 지금은 서쪽 산록 바깥쪽 10리쯤으로 옮겼다.”라고
하여 지금의 존자암지가 원래의 자리가 아닌 이전된 자리임을 밝히고 있다.
원래 영실 계곡에 존자암이 창건되었다가 14세기 후반경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존자암이 언제 창건된 것인지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전혀 없다.
구체적인 장소 비정을 통해 유구와 유물의 발굴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자암은 제주도의 중요 사찰로 인식되었다.
홍유손이 지적한 것처럼 존자암은 국가적 차원에서 중시되었던 비보사찰이면서 국가적 제사가
행해지던 장소였다. 존자암에서 행해졌던 국성재(國聖齋)를 세 고을의 수령 중에서 차출된
사람이 봉행했다는 사실은 국성재가 민간의 제사가 아니고 국가적 차원의 제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아울러 한라산의 존자암에서 국성재를 거행했다는 사실은 국성재가 한라산
산신제의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최초의 존자암은 어디에 있을까?
여러 기록에서 최초의 존자암이 영실에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어서 영실 골짜기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두 차례의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원존자암지를
입증할 만한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일부 학자는 수행동(修行洞)을 영실 동쪽
산록에 있는 수행굴에 비정하여 수행굴을 최초의 존자암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은 원존자암지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지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영실 일대에 대한 심도있는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원존자암지의 발굴과
더불어 수행굴, 두타사와 같은 한라산의 다른 가람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도 이루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