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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생활

제주 역사·문화의 길을 열다 ~제주일보에서(3월16일)

by 동파 2021.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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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문화의 길을 열다.신유박해로 집안 몰락…

제주에 유배온 첫 천주교인 정난주의 묘.

정난주는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 황사영이 능지처참에 처해지자 제주목 대정현 관노로 정배됐다.제주에 유배온 첫 천주교인 정난주의 묘.



(83) 유배인 권진응·정난주
정난주, 제주에 유배 온 첫 천주교인…남편 처형 후 관노 생활
권진응, 영조 탕평책 반대하다 귀양…주자 뜻 이어받아 훈학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허련 등과 다도 통해 종교·학문 교류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선비들의 다례를 엿보다

 

1843년 어느 날, 추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차를 갖고 초의선사 일행이 제주에 오자,
제주의 제자들도 추사 유배지인 수성초당에 모여 선비다례가 열렸다.
조선 후기 유교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와 불교를 대표하는 초의선사가 차를
통해 종교적?학문적 한계를 뛰어넘는, 교류?화합?공감의 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팽주는 수성초당의 주인인 추사 김정희이며, 팽주 측 선비로는 추사의
제주 제자들인 매계 이한우(이한진), 강공규, 강도순이다.
손님은 초의선사와 향훈 스님, 소치 허련이며, 그 외 화동과 다동이 곁에서
시중을 들었을 것이다. 추사 이외의 인물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겠다.

초의선사는 추사가 태어난 해인 1786년에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침체됐던 조선 불교계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선승(禪僧)이며,
특히 차 문화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도 불린다.
그는 불교 이외에도 도교와 유학 등 여러 분야에 능통했다.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과 두터운 교분을 쌓는 한편,
추사 김정희를 불교에 귀의케 한 비범한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6개월여 머물렀다.

소치 허련은 1835년에 초의선사를 처음 만나 시(詩)·서(書)·화(畵)의 기본을
익혔다고 한다. 소치는 1839년 초의선사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를 소개받아 체계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그는 19세기 조선의 화단에서 장승업과 함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주목받았다.
추사 김정희가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극찬할 정도로 서화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스승 추사에게 배우기 위해 세 번 제주를 방문해
1년여 머물렀다.

향훈 스님은 해남 대둔사 스님으로 추사가 초의선사를 명선(茗禪)이라 칭했던
것처럼 다선(茶禪)이라 칭할 만큼 차에 조예가 깊었다.
매계 이한우은 천문·산경·지리·병서 등에 통달했다.
특히 시에 능해 1853년 제주목사 목인배는 이한우의 글을 남국태두 즉 남국의
태산이요 북두칠성이라고 극찬했다.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 당호(堂號)를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이름 지었던 그는,
제주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다인(茶人)이었다.

선비들에게 차와 시는 한 묶음의 설치예술 행위였을 것이다.
잔을 든 주인인 추사가 견향(見香)이란 시를 먼저 읊었다.
견향이란 부처님의 향기를 맡고 바른 지혜와 진리를 깨친다는 의미란다.

 

망망한 대지에
비리고 탁한 내음 코 찌르는데
눈 속의 묘한 향기
그 신비로움을 누가 발할까
물푸레나무는 자취가 들어나고
천화는 내 맘 같으니
빛과 소리 서로 오가는데
문수(文殊)보살과 같이 아파하는 마음인 것을

茫茫大地(망망대지)
腥濁逆鼻(성탁역비)
眼中妙香(안중묘향)
誰發其秘(수발기비)
木犀無隱(목서무은)
天花如意(천화여의)
光陰互用(광음호용)
文殊不二(문수불이)

 

이어 손님인 초의선사가 화답시를 읊는다.

예부터 어진 성인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와 같아 성품에 삿됨이 없네
사람이 차를 처음 마시게 된 것은
멀리 설령(중국에 있는 산맥 이름)에서 찻잎을 따면서라네
차의 참된 본체는 오묘한 근원을 통하였고
묘한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라밀(보살들의 수행)이 되리라
비단으로 묶인 옥병 마개를 잘 끌러
먼저 친구님네들에게 선사하노라.

이에 제주 선비이자 영주십경으로 널리 알려진 매계 이한진이 화답하다.

천 리 밖 남쪽 물가 초가집 한 채
임금은 노인성을 보는 은혜를 내리셨네
밤마다 외로운 마음 향 사르고 앉아
흐느껴 울적마다 흰 머리털 느네

 

千里南溟一草堂(천리남명일초당)
聖恩許見壽星光(성은허견수성광)
孤衷夜夜焚香坐(고충야야분향좌)
感泣頭邊白髮生(감읍두변백발생)

위의 시는 은사인 추사에게 바치는 매계의 시이다.
매계는 스승이 머무는 집을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수성초당이라 이름 지었다.

 

▲산수헌 권진응
권진응은 1771년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아
대정현 창천리에 유배됐다. 유배 중 강팔발의 집에 머물며 그 집을 창주정사라
이름 짓고 제주 유생들을 가르쳤다.
창주는 주자의 호이고 산수헌은 권진응의 호이다.
창주정사는 주자의 오도부창주지의야(吾道付滄洲之義也)에서 따온 것으로,
주자가 만년에 귀양살이 한 고장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집의 이름이자,
유학의 성현을 모셔 제례를 지낸 건물 이름이다.
1772년 1월 60세가 넘었다고 하여 특별사면에 의해 유배가 풀린 권진응은,
귀향하기 전 제주의 지방유지들과 사림에게 건의해 송우암적려유허비를
세우게 했다. 1772년 2월 김양행의 글과 이극생의 글씨로 된
우암선생적려유허비를 (제주시) 산저포의 적거지에 세웠다.
그 일을 뒤에서 주선한 적객 권진응이 그 비를 탁본해 책으로 꾸미고,
책 말미에 비를 세우게 된 동기와 내력 등을 적어 후일 참고가 되도록 했다.
제주에 유배된 우암 선생의 적거지가 김환심가(家)임을 알게 된 내력과
그의 손자 김성택을 그 자리에 집을 지어 살게 해 소나 말이 밟지 못하게
한 일들을 미루어 볼 때 권진응이 우암선생을 추모하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후일 이 비석은 제주향교로 옮겨졌다가 다시 오현단으로 이건됐다.

 

▲정난주 마리아
1773년에 태어난 정난주는 일찍부터 외숙의 교화와 숙부들의 가르침을 받아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실학자 정약종·정약전·정약용 삼형제가
그녀의 숙부였고, 어머니는 조선 천주교의 성조(聖祖)인 이벽의 누이였다.
1791년 황사영과 혼인한 정난주는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다.
1775년 태어난 황사영은 16세에 초시, 17세에는 복시에 장원급제했으며,
결혼 직후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알렉산델이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와 명도회를 조직해 포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해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작성했다.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에는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 재건책 등을 담고 있었다. 이 백서가 그 유명한 황사영의 백서로,
길이 62cm·너비 38cm인 흰 비단에는, 검은 먹으로 한 줄에 110자씩 121행, 합
1만3000여 자가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백서가 북경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 발각돼 대역죄인으로 체포된 황사영은,
그해 11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그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어린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떠나야 했다.
제주목 대정현 관노로 정배된 정난주는 순교적 삶을 살다가 1838년 숨을 거뒀다.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정난주의 유해를 지금의 장지인 대정읍 동일리
지경에 안장했다.

 

권진응이 제주의 지방유지들과 사림에게 건의해 세워진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