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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생활

홍윤애와 조정철의 슬픈 사랑 이야기~고훈식 시인

by 동파 2021.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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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홍윤애와 조정철의 슬픈 사랑 이야기

고훈식 시인 · 조엽문학회 회장

벌써 20년도 지난 일인데 제주문화원에서 제주역사 돌아보기 일환으로
'홍윤애와 조정철의 눈물겨운 사랑'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그 때 객원으로 참가한 나는 제주도 유배문화의 백미인 제주도 여인 홍윤애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내용을 처음 알았다.

1997년 11월 9일,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조정철 일가인 양주조씨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에서는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이 때 종헌관으로 제주문화원 홍순만 원장이 참가하였는데
홍윤애가 비명에 간 지 186년 만에 이뤄진 복권이다.

요약하면, 조정철은 1777년(정조1) 8월로 이를 정유역변(丁酉逆變)에 연루되어
제주에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유배인의 삶을 가련하게 느낀 홍윤애가 도와주는
과정에서 사랑이 이루어졌다.

홍윤애는 남양 홍씨로 아버지는 향리 홍처훈(洪處勳)이고 제주 입도 시조인 사재감
홍윤강(洪允康)의 13세 손이다. 홍윤애의 가계는 고려 말의 정승 홍언박(洪彦博)의
후예로, 고려 때는 여러 대에 걸쳐 정승과 대신을 배출한 높은 문벌이었다.

1781년(정조 5년) 3월에 김시구(金蓍?)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시구는 조정철과 당파가 달라 서로 상극이었다. 김시구는 배에서 내린 날부터 이미
조정철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역적모의를 획책한다는 밀계를 꾸몄는데 홍윤애의
자백을 통하여 죄상을 엮으려고 문초하였지만 고문과 회유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죄가 없음에도 장 팔십대를 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이날이 1781년 윤 5월 15일이다.

후에 조정철은 우여곡절을 견디며 29년의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관직에 등용되자
1811년(순조 11년)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를 자원하고 부임하여 생명의 은인인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다. 27년 동안이나 유배인으로 곤욕을 치르느라고 비원이 서린
제주에 사또가 되어 행차하였으니 실로 제주를 떠난 지 8년만의 일이며 홍윤애가
조정철 때문에 매를 맞고 죽은 지 31년만인 셈인데 이때가 조정철의 나이 61세 환갑이
되던 해이다.

목사 신분의 사대부가 한 여인의 무덤에 찾아가 통곡을 하고 쓴 조정철의 추모시는
유배문학의 꽃이라고 할 만큼 문학적인 역량이 뛰어나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한 여인의 순애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주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기질이므로 제주여성사에 빛나는 정의 그 자체라는
논지에 나도 감동 받았다. 이 제주유배문화 역사는 서양의 '로미오와 주리엣'의 비련이나
춘향전보다도 비극미가 대단하다는 착상에 제주문화콘텐츠로 창작하여 제주여성문화
발전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밝힌 제주문화원 홍순만 원장님을 필두로 선배 문인들의 작품이
뒤를 이었고, 도에서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필자도 뜻을 보태려고 노력하다보니 참고자료로 양주조씨 사료선집(楊州趙氏 史料選集)과
2006년 12월 향토사학가 김익수(金益洙)가 번역하고 제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과 소설가 한철용이 지은 「사랑의 영웅들」을 구했다.

그 자료를 토대로「홍윤애와 조정철의 눈물보석 궤삼봉」제목으로 장편시낭송대본을 썼다.
하지만 미흡한 곳이 많아 지인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있지만 나름으로는 제주어 보전이나
전승에 신경을 썼다. 제주오페라 어느 단체에서 제주도를 위한 오페라가 창작될 때
조금이나마 대본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헌(靜軒)은 조정철의 호이고,
영해(瀛海)는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이며 처감록(處坎錄)은 구렁텅이에 처박혀
살았다는 기록인데 제주어 궤삼봉이라는 말은 참사랑을 의미한다.

제민일보:20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