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산불교대학

[스크랩] 제주 원당봉 원당사(元堂寺)

by 동파 2017. 12. 7.
728x90

원당사(元堂寺)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원당로16길 38
지번삼양1동 647

연락처:064-755-9905 대표번호
소개:대한불교 태고종 원당사

원당사 일주문


대웅전



극락전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제주시 삼양동에 서 있는 원당봉(170m)은 주봉인 원당악과 망오름, 도산오름, 동나부기,
서나부기, 앞오름, 펜안오름 등 7개의 봉우리와 3개의 능선이 이어져 있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제주 명산이다. 이 오름 중턱에 중국 원(元)나라의
당(堂)인 원당(元堂)이 있었다고 하여 원당봉(元堂峯)이라 이름 했다고 한다.
 
원나라 공출돼 끌려간 여인
재색·정치력 발휘해 황후로
오빠 국정농단 연루 오점 남겨

훼불사태 만연했던 조선중기
불교중흥 횃불 든 허응 보우
제주목사 변협에 타살돼 순교

저 원당은 이 땅에 원 나라의 힘이 막강하게 미칠 때 들어섰을 터.
그렇다면 원의 연호를 사용해야만 했던 고려의 원나라 복속기(1270∼1356),
적어도 제주도를 기반으로 대몽항쟁을 펼쳤던 삼별초군이 원나라 군대와 고려 정부군에
의해 토벌 당한 이후(1273) 원당이 지어졌을 터다.

산 아래 작은 마을, 높이 1m가 좀 넘을 법한 낮은 돌담 너머로 오후 햇살을 가득 안은
탑 하나 보인다. 제주도에서 발견된 탑 중 고려시대 유일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는 보물(1187호)
불탑사 5층석탑’이다. 불탑사의 고려 때 이름은 원당사였다. 고려의 여인이요,
원나라 순제 황후였던 기황후 삶의 질곡이 저 탑에 담겨 있다.

고려의 선종이 몽고군에 항복(1270)한 뒤 원나라는 공물과 함께 벼슬 집안의 동남동녀를 요구했다.
요구는 관례로 이어졌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 ‘죽부인전’ 저자 이곡(李穀)은 ‘
동녀 차출 금지’를 청하는 상소문 ‘대언관청파취동녀서(代言官請罷取童女書)’를
중국 황제에게 올린 바 있는데 고려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새어나갈 것을 걱정하여 비밀에 붙여 이웃도 알지 못합니다.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얼굴빛이 변해서는 서로를 보며 수군댑니다. 동녀를 잡으러 왔는가?
아내와 첩도 잡아가는 건 아닐까? 중국 사신이 당도하면 곧바로 군인들이 집집마다 여자를
찾아다닙니다. 숨기면 이웃과 친족을 잡아 매질하여 반드시 찾아냅니다.
선발되면 부모와 친척이 통곡하기에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습니다. 국경 밖으로 갈 때는
서로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에 엎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습니다. 비통하고 분개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이도 있고 피눈물을 흘려 눈이 먼 사람도 있습니다.’

절에 숨어 있던 익주(익산)의 열다섯 살 기순녀도 공납 여자 징발을 담당했던 과부처녀추고별감에
발각돼 원나라로 떠나는 배(1331)에 올라야 했다. 아버지 기자오는 통곡했고,
어머니는 실신했다. 그의 오빠 기철, 기원 역시 밀려오는 분통에 땅을 쳤을 터다.

기순녀는 재색을 겸비한 여인으로 대담하면서도 영특했다. 원나라의 왕 순제(順帝,
재위 1333~68년)의 다과 시봉을 드는 궁녀로 발탁된 후 최고 권력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남다른 정치력을 발휘해 제2황후 자리에까지 오른다. 기황후에게 한 스님이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에 탑을 세운 후 기도 올리면 아들을 얻을 것’이라 귀띔 한다.
삼첩칠봉! 바로 여기다.

기순녀가 항후에 오르기 전 원당이 들어섰다고 보면, 삼첩칠봉 정보는 고려와 원나라를 오고 간
사람들로부터 입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황후가 보낸 사신이 직접 확인하고는 절을 짓고 탑을 세웠다.
그 절이 현 불탑사의 옛 절 원당사(元堂寺)요 ‘원당사 오층석탑’이다.

가피가 있었던 듯 기황후는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았다. 훗날 원나라 12대 황제에 오른 소종(昭宗)이다.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뜬 뒤 기황후는 원나라 제1황후가 되었다. 

원 나라 내정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에서도 기항후의 세력이 미쳐 그의 가문 또한 득세했다.
특히 오빠 기철은 기황후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에 머리 숙이는 공민왕을 보고는 왕조차도
안하무인으로 대하며 신하 도리마저 내팽개쳤다. 마을 사람들을 겁박해 재산 빼앗는 일도 다반사였다.
공민왕은 결국 기철의 역모혐의를 잡아 제거했다. 오빠의 숙청 비보를 접한 기황후는 분개하며 복수를
결심하고 군사 1만명을 동원해 고려를 쳤다. 그러나 압록강을 넘은 원병(元兵)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대패했다.

공납 대상에 올라 이국 땅으로 끌려갔으나 황후 자리에 올랐던 여인. 고려인의 공녀 관행을 폐지하는
데 앞장서고, 고려를 원의 성(省)으로 귀속시키려는 계획도 무산시켰던 그였다. 그러나 오빠의 국정농단
사태를 직시하지 못한 그는 모국에 칼을 겨누고 말았다.

원당사는 세월에 무너져 탑 하나와 터만 남겼으나 1900년대 초반 중창불사가 이뤄져 불탑사라 불리고 있다. 

 

참고:법보신문에서 인용을했습니다.제주도에 살아가면서 유익한 자료가 되고있습니다.

 


출처 : 동산불교대학37기
글쓴이 : 동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