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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2

경주 남산서 신라의 '시작과 끝'을 만나다

by 동파 201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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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는 지난 4월6일 경주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주관하고 현대불교신문에서

협찬하는 남산 불적 답사에 처음 동참했습니다.

아래의 글은 현대불교신문에 기재를 인용하였습니다.

 

남산 아래 위치한 나정·포석정
천년 신라의 始終을 담아내
포석정, 단순 연회장소 아냐
무수한 유구만 남은 창림사는
혁거세가 머문 금성으로 추정

   
▲ 답사단이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에서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창림사지 석탑은 남산에서 가장 큰 탑으로 7m에 달한다.
올해 4월의 날씨는 유난히 변덕스럽다. 만개한 봄꽃을 시샘한 듯 4월의 첫 주말, 강풍을 동반한 많은 비가 내렸다. 신라문화원의 경주남산불적답사도 안전을 우려해 남산에 산재한 불상을 돌아보는 것에서 신라의 시작과 끝을 살피는 것으로 코스를 변경했다.

천년 신라의 시작, 나정
사실 경주 남산은 천년 신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왕이 살았던 서라벌 궁성 월성(月城)에서 보았을 때 남쪽에 있는 경주 남산은 신라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곳이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나정이 남산 자락이고, 신라의 종말을 가져온 포석정 또한 남산에 자리하고 있다.

나정은 그 위치부터 남다르다. 나정에서 남쪽과 동쪽을 바라보면 금광사지와 남간사지가 있고, 그 뒤편으로는 창림사지와 포석정이 한꺼번에 보인다. 그 옆으로는 남산 서쪽 기슭이 한눈에 들어오며, 북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오릉과 천관사지가 펼쳐진다.

현재 나정은 문화재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를 진행해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상태다. 4번의 발굴 조사를 통해서는 우물지, 원형건물지, 팔각건물지 등이 확인됐다. 우물지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으로 길이 4.3m, 너비 2.5m, 깊이 1.7m 정도이며 우물지를 중심으로 우물지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이라고 하지만 그 형태가 일반적 우물과는 차이가 있다. 신라시대의 우물은 식수답이 아닌 제사 등의 용도로 다르게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나정에서 동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는 신라 건국을 도운 6부 촌장들의 위패를 모신 양산재가 있다. 전형적인 재실 건출으로 지어진 이 사당은 1970년대에 세워졌다.

흔적만 남은 남산 절터들
나정과 양산재를 돌아 나오면 적지 않은 남산 아래 절터들을 만날 수 있다. 이 부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남간사와 창림사다. 현재 남간사는 마을이 들어서 건축의 규모나 가람배치 등은 알 수 없지만 당간지주를 통해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보물 제909호로 지정된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남산 지역에서는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논 한가운데 있었던 것을 최근에 유적지로 정비했다. 이 당간지주는 단순한 형태이면서도 안정감을 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십자형의 간구(竿溝)가 있고 몸체에는 두 곳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다. 특히 십자형 간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것이다.

남간사지 옆 신작로를 따라 10여 분을 걸으면 창림사지를 만날 수 있다. 창림사는 남산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석탑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쌍두귀부와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이 출토됐으며, 2011년에는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창림사지 석탑의 원기인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를 발견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원기에는 문성왕이 대중(大中ㆍ당나라 연호) 3년(855)이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탑을 세우니 그 공덕이 널리 미치기 바란다”는 발원문과 탑 조성에 관여한 승려와 관리 명단이 담겨 있다.

〈삼국유사〉에도 창림사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혁거세와 알영 왕비가 태어난 후 이곳에 궁궐인 금성을 지어 13년 간 살았다”는 기록돼 있다. 이 같은 기록들을 통해 창림사가 당대의 명찰로서 그 위용이 대단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창림사에서 주목해 봐할 곳은 바로 삼층석탑이다. 7m에 달하는 그 크기도 놀랍지만,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탑 하단에 부조된 팔부신중들이다. 현재는 8개의 도상 중 절반이 결실돼 아수라, 마후라가, 천, 건달바만이 남아 있다. 모두들 구름을 타고 천의를 날리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풍부한 양감이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 남간사지 당간지주. 남산의 사찰과 사지 중 유일한 당간지주다.
최민희 신라문화연구원 부설연구소장은 창림사지 삼층석탑과 더불어 한 구의 탑이 더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창림사 삼층석탑 원기에는 탑의 조성 시기를 855년으로 기록하고 있어 탑의 조성연대를 이 시기로 잡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추정입니다. 9세기 중엽의 신라 조각은 쇠퇴기여서 이 같이 풍성한 양감의 조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 팔부중을 새긴 상층기단 면석이 세 구가 발견됐는데 현재의 탑의 면석보다 작았고 조각 기법도 9세기에 가까웠습니다. 창림사지에는 팔부신중이 조각된 쌍탑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어찌 됐던 왕가의 영광과 중생 구제의 원력으로 세워진 창림사는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는 탑을 통해 불국토 남산의 서쪽을 장엄하고 있었을 터이다.

포석정에 가기 전 유느리골절터 마애삼체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5호)을 찾았다. ‘ㄱ’자로 꺽인 암벽에 3구의 불상을 새겼다. 중앙불 왼쪽에는 ‘태화 9년 을묘’라는 명문이 있어 흥덕왕 10년(835)에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2명이 조각돼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경주 남산은 알면 알수록 더욱 궁금한 것이 많아지는 곳이라는 점만 다시 확인할 뿐이다.

‘승자의 역사’가 남긴 오해들
마애불을 보고 포석정으로 내려오니 비가 조금씩 잦아진다. 포석정은 수로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놀이인 ‘유상곡수연’을 즐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포석정은 신라 말기의 애환과 치욕이 담긴 곳으로 더 유명하다.

〈동국통람〉에는 “경애왕(景哀王) 4년(927) 왕이 신하와 궁녀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견훤군이 입성했다는 말을 듣고 왕비와 함께 성남의 이궁에 숨었다. 그러나 곧 견훤에게 잡혀 경애왕은 자진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승자 위주로 쓰여졌던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가 망할 수 밖에 없는 쇄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점을 후대에 인지시켜야 했고, 경쟁자인 후백제의 견훤은 상대적으로 포악한 인물로 남아야 했다.

실제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포석정이 단순히 연희를 즐긴 곳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음력 11월경으로 양력은 12월에 해당하는 시기다. 얼음이 어는 겨울에 유상곡수연을 할 수 있지 않다는 점은 상식에 가깝다. 또한 이미 9월에 견훤이 영천까지 침입한 사실을 알고 왕건에 도움을 청한 경애왕이 술잔치를 벌일 정도로 폭군이었다면 후대의 경순왕과 신하들이 그의 장례를 치르며 애절히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리도 만무하다.

   
▲ 경주 남산 아래 위치한 포석정. 연회 장소만이 아닌 종교적 성소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 소장은 포석정이 단순히 연희를 베푸는 이궁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포석정의 행사에 왕과 비빈, 종척, 화랑이 참석했고 가무가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유상곡수를 하는 연회 장소가 아닌 종교적 성소로 활용됐음을 확인시켜줍니다. 포석정이 신라 왕실의 이궁이라는 견해도 재고의 여지가 많습니다.”

답사를 마치니 잦아졌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비를 맞은 벚꽃들이 길가에 내려왔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도 마지막은 흐드러지는 봄꽃과 같았다. 굴곡많은 인간사처럼 굽이진 포석정이 애처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