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6월15일 인천공항을 2시에 출발하여 남경에 도착후에는 구화산으로 향했다.
구화산 오계산색(五溪山色)에 여정을 풀고 다음 날 16일 아침 구화산 고배경대(古拜經台)에 도착했다.
학교에서 김교각 스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기에 우리 일행은 일체가 유심이라고 했듯이 지장기도의
시작이 되었다
원산.일광명.혜조.자재행.동파.자력정.신행화.성광명
이곳 천태사 대웅전 앞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미공양을 올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
육신보전(肉身寶殿)또는 월신보전(月身寶殿)이라고 하는 곳에 김교각스님의 육신 즉 등신불을 봉안한 곳이다.
직접 친견 할 수가 없이 탑 속에 봉안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생도진(衆生度盡) 중생을 제도해 마침에
방증보제(方證菩提) 그들이 보리를 증득하고
지옥미공(地獄未空) 지옥이 다 비워질 때까지
서불성불(誓不成佛) 결정코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경전을 독송하고
정근을 하면서 환희심 가득하여
편액이 있는 이곳에서
김교각스님의 서원을 되새겨봅니다.
김교각(金喬覺)스님
신라 32대 호서왕의 왕자로서 본명은 김중경,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불교에 대한 깨달음이 남달랐다고 하며,
24세가 되든 해 장래의 왕 자리를 박차고 출가를 하게 된다. 오대산 상원암에서 수행하든 중 돌연 당나라로
떠날 결심을 하고 지청(地聽)이란 개를 길벗 삼아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넜다.
이 때가 신라 성덕왕 때였으며,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옛 오월(吳越, 현 절강성 동부)의 해안이었다고 한다.
그는 도보로 강남의 여러 산을 두루 탐방하며,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돌아다녔다.
천신만고 끝에 개원 말(開元末), 강남 지주(池州)에 도착해 구름 끝자락에 걸린 구화산을 바라보며,
이곳이 바로 그가 그리던 땅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국대륙을 헤맨 지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교각스님이 하필이면 이곳 구화산을 거처로 삼았느냐 하는 것은 스님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으나,
여러 선각자들(구화산 스님 협회 회장이신 仁石스님 등)이 추정한 바로는 이곳이 교각스님의
고향인 경주와 비슷한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곳 구화산으로 올 때 또 벼 씨앗과 차 씨앗, 그리고 소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셨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 산에 있는 소나무는 모두 우리 나라 소나무 후손인 셈이다.
처음 이곳에 오셔서 혼자서 수행하던 중, 어떤 젊은이가 호랑이에게 잡혀먹는 것을 구해 준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민공(閔公)께서 교각스님께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나에게는 수행할 장소가 필요하니 수행할 만큼 땅을 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답했다.
민공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하니,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걸치고 있는 가사를 던져서 가사가 덮이는 부분만 주시면 됩니다.”
민공이 쾌히 승낙하자 스님은 그 자리에서 가사를 벗어 하늘로 던졌다.
그 가사는 하늘로 하늘로 날아가 구화산 99 봉우리를 몽땅 덮여버렸다.
그래서 구화산 전체가 교각스님의 수행처가 된 것이다.
또한 교각스님의 법력을 본 민공께서는 스님이 구해준 자기 아들을 제자로 딸려 보내게 되는데 이분이 뒤에
동명전자로서 항상 교각스님 바로 아래에 모시게 되는 스님이 된다.
또한 민공도 말년에 교각스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게 되니 먼저 출가한 자기
아들의 제자가 되는 기묘한 인연을 맺게된다.
스님은 당나라 정원(貞元) 10년(794년) 7월 30일, 99세에 입적하게 되는데 그날은 화성사의
종이 떨어졌다고 한다. 열반 당시 유언을 하기를 “내가 죽거든 항아리에 넣어 3년 후에 개봉해 보거라.
지금 이대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생을 모두 제도한 후에야 보리가 되리니,
지옥을 비우지 않고서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는 서원을 했다.
그래서 스님이 시킨 대로하고, 3년 후 항아리를 개봉하였더니 스님 말씀 되로 생전 모습으로 계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스님을 등신불 중에도 중생을 계도하는 지장보살로 추앙되었다.
이날이 음력 7월 30일, 교각스님이 지장보살로 다시 태어난 날이 되었다.
그 때부터 매년 이날이 되면 한 달 동안 교각스님을 기리는 불사가 행해지고 있다.
왕관을 쓰신 김지장왕 보살상
김교각스님의 신발과 모자
청나라 건륭황제의 어필
화성사의 전경
최근 인의 비구니 스님의 등신불을 모셔논 통해선사(通慧禪寺)
통혜선림(通慧禪林)
인의법사진신보살(仁義法師眞身菩薩)
항아리
인의 비구니 스님의 등신불
인의법사(仁義法師 1911~1995)
속명은 강소민(姜素敏)으로 동북사람.
1940년 오대산 현통사(顯通寺)에서 출가해 ‘인의’라는 법명을 얻었다.
출가 후 전심으로 수행해 1995년 4월 구화산 통혜선림(通慧禪林)에
이르러 초겨울에 7일간
음식을 끊은 후 입적했다.
당시 나이는 85세였다
벡세궁(百歲宮)
백세궁이 무엇인가? 위의 설명문에 의하면 명나라 만력 연간의 일이다.
만력은 신종 황제(1572~1620)의 연호이므로 지금부터 약 400년전이다.
무하(無瑕)화상이 이곳 구화산에 초가집을 짓고 수행을 하다가 126세에
입적하였다. 3년간 육신이 부패하지 않음에 사람들이 육신에 금을 입히고
암자를 지어 적성암(摘星庵)이라고 하였다. 명나라의 의종 황제 때인
1630년에 황제가 무하화상에게 "응신보살(應身菩薩)"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위선최락(爲善最樂)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같은 해에 절을 중창하고 적성암이란 이름을 만년선사(萬年禪寺)로 바꾸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부터 사람들이 백세궁이라고 불렀다.
1983년에 불상을 중수하고 무하화상의 육신에 금을 덧 입혔다.
무하스님의 등신불
화재로 인하여 옮기는 과정에서 팔이 올라갔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었지만 희망봉님의 블로그에서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무하스님의 화엄경 혈경(血經)
기원선사 대웅전(구화산의 4대총림중인 기원사)
南無 南方化主 大願本尊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地藏菩薩(지장보살)...
地藏菩薩滅定業眞言(지장보살멸정업진언)
옴 바라 마니다니 사바하(3번)
地藏菩薩威信力 恒河沙劫說難盡
지장보살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
故我一心 歸命頂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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