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三國遺史, 보물 제 419호)
이
책은 고려 후기의 고승이던 일연(一然, 1206∼1289)이 기력을 쏟아 부어
편찬한 역사서로 전권이 5권으로된 목판본이다. 삼국유사는 단군신화가 기록된 최고(最古)의 책으로 우리는 이책을 통해 한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알 수 있으므로 신성시하고 있다. 일연은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청년 시절부터 자료를 수집했다고 전해지며, 집필은 70대 후반부터
8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다. 자료 수집을 마친 일연은 보각국사라는 명예까지 벗어 던지고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麟角寺)로 들어갔다. 이 절은 64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절 앞쪽에 있는 절벽에서 기린 뿔이 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때 일연의 나이 77세 경이었다
다만
기록만 해 놓았다
삼국유사는
전체가 5권 2책에,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등 9편 목으로 구성된 방대한 내용이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등의 간략한 연표이고,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다. 또 이 책에는
건국 신화를 비롯해 14수의 향가(鄕歌)가 수록되어 고대문학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며, 아울러 한국 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미술에 걸친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寶庫)로 평가받는다.
일연에 의하여 삼국유사 초간본이 간행되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고, 제자 무극(無極)에 의해 1310년대에 '삼국유사'가 간행되었다. 무극은 삼국유사를 간행하면서 두 군데나 기록을 첨가했는데,
'무극기(無極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 또한 분명치가 않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삼국유사는 인본(印本)인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며, 이는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것들이다. 석남은 민속학자인 송석하(宋錫夏)의 아호로 그는 전 5권 중에서
왕력(王歷)과 제 1권만을 1940년부터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분실되어 소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송은은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의 호로 그는 3·4·5권을 소장하다가 지금은 손자인 곽영대(郭英大)가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 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삼국유사는 송은본과 석남본을 모사한 필사본으로 1940년 이후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다만 기록해 놓을 따름이지 옳고 그름은 후에 똑똑한 선비들이 대들어 해결해 주시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그는 또 일찌감치
인연을 끊었던 아흔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국사직까지 벗어 던진 당대의 효자였다. 일연은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가부좌를 튼 채 홀연히
입적했는데, 부도를 세울 곳을 몰라 제자들이 흐느끼자 차분히 다시 일어나 동남쪽을 가리키며 눈을 감았다 한다. 그 동남쪽에는 일연의 어머니
묘소가 있었다. 그 후 일연의 부도탑은 도굴꾼이 무자비하게 파헤치기 전까지 7백년이 넘는 세월을 어머니 묘소에 나란히 서 있었다. 지금은 인각사
경내로 옮겨져 보각국존비(보물 제428호) 앞뜰에 서 있다.
삼국유사를 지키기 위해 스님이 되다
문화재를
아끼며 소장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둑을 맞거나 강도를 만날 위험도 있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생활고이다. 단순히 돈이 많고
취미 삼아 수집했다면 이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쉽게 흥정해서 팔아 돈을 마련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소장할 각오로 수집한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라면 또한 팔기 쉬운 일이 아니다. 정이 들기도 하고, 또 팔 경우 조상을
볼 면목이 없어 팔아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점에 억대가 넘는 명품을 소장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팔지
않는한 생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만약 세상에 똑같은 물건이 여러 개 있다면 달리 생각해 볼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장한 고미술품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것이라면 생활고에 시달리더라도 소장하고픈 마음이 든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한 점 팔아서 팔자도 고치고 호강하면서 살면 되지, 무엇 때문에 껴안고 고생하며 살아?'
고미술품을 돈으로만 평가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인 고생만을 안타깝게 여겨 하는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세가
기울기도 하고 엉뚱한 일로 곤경에 처하기도 하는 법, 단 한 점만 팔아도 현실적인 고생을 벗어날 수 있는데, 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사연이 있을까?
그것은 그 한 점에 조상의 얼과 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할
사람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거금이 될 만한 국보급 문화재를 여러 점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스님의 길을 택한
이, 이제는 도해(道慧)라는 법명으로 불리우는 곽영대이다.
학자들은 곽영대는 삼국유사를 소장한 사람정도로만 알고 있다. 물론 사실이다.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보물 제 418호인
제왕운기, 보물 제 288호인 청동은입사향로(靑銅銀入絲香爐), 그리고 1948년 당시, 반듯한 기와집 두 채를 살 수 있던 일 백만원을 호가하던
통일 신라의 금동탄생불입상, 그 밖에도 낙랑청동다상(樂浪靑銅茶床)등 빼어난 일품만을 소장한 대수장가이다.
곽영대는 두 살때 이병직의 이성 손자(異姓孫子:혈연관계가 없어 성이 다른 양자)로 들어와 이병직의 무릎
팎에서 고미술품을 보고 배웠다. 이병직의 집안은 대대로 궁궐에서 임금을 모시던 내관직이었고, 가까이는 고종 황제를 모셨다. 곽영대의 할아버지
이병직은 대궐에서 하사 받은 고미술품을 보고 자랐고, 또 당대의 명필이자 묵죽(墨竹)의 명수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와 사군자의 화법을 배워 50년 대 후반에는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서화와 고미술품에 밝았다.
말하자면 이병직은 고미술품과 함께 자라고, 고미술품과 함께 호흡했으며, 고미술품과 함께 늙어 간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
골동계를 이야기할 때는 누구보다도 먼저 손꼽힌다. 이런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곽영대가 고미술품에 대해 눈을 뜬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차를 즐겨 마신 이병직은 언제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고 옷매무새도 빼어나 잘 어울려 보였다. 여름에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한산 모시 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받쳐입었고, 겨울이면 회색 빛의 모직 두루마기를 갖춰 언제나 단정한 차림이었다.
생활민속품에서 시작한 이병직의 문화재 수집은 어느 새 토기, 도자기, 서화로 옮아갔고, 해방이 되면서는 금속 유물의 대가 김동현과 가까이
지내면서 금속 유물로까지 안목을 넓혀 갔다. 이병직이 금속 유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동안 수장했던 다량의 서화와 도자기가 밖으로 실려 나갔고,
대신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의 불상, 청동 향로와 삼국유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이병직의 집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는데, 일제 치하 칠 천석꾼의 부자였다. 일 년에 칠 천석을 추수해 거두어들였다면 당시 내노라 하는 부자가 많다던 서울에서도 몇 안되는
부자였다. 시골에서 몇 백 석만 농사를 지어도 부자라고 으스대며 자녀들을 고등교육까지 받게 하던 시절이었다. 바깥채와 안채가 나뉘어진 격식 있는
한옥 집은 2 백평이 넘는 대지에 세워져 있었다.
사랑채엔 언제나 고미술품을 아는 손님들이 북적였다. 이
집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잘 꾸며진 조선식 정원과 풍류에 어울리는 음식 등, 자아내는 분위기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그 집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병직의 인물됨을 돋보이게 한 것은 교육열이었다. 나라를
잃고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그 당시로써 거금인 10만원을 서슴없이 희사해 의정부 중학교를 설립했고, 나아가 선영이 있는 양주군
광적면에 효촌 초등학교까지 세웠다. 개인의 영화나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초석이 되는 교육 사업에
투신하겠다는 그의 신념은 그간 소중하게 간직하던 고미술품을 수도 없이 내다 팔기에 이르렀다. 그는 학교 건립을 위해 많은 고미술품을 내다 팔며
일부는 경성미술구락부 전시 경매를 통해 처분하였다. 이병직은 학교만 설립했지 학교 운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병직이 교육 사업에
모든 재산을 쏟아붓자 집안은 급속도로 가난해졌고, 더욱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 2월 이후이다.
그 해에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소작인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주에게는 토지 대금으로 지가
증권(地價證券)을 주자는 것으로 토지 대금은 국가에서 대신 보상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면서 화폐가치가 추락해
지가 증권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대지주였던 이병직은 일시에 농지를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1970년대 이병직은 인생의
날개를 접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평생을 애장하던 유물 몇 점을 곽영대에게 물려주며 유언을 남겼다.
"네가 고생을 했으니까 어렵거든 팔아서 써라." 그러나 곽영대는 인자하고도 엄격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또 할아버지의 손길이 닿고 민족의 혼이 담긴 유물들을 단지 생활이 어렵다고 팔아 쓸 수는 더욱 없었다.
전세 집을 전전하면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 시시때때 조여 오자 그는 삼국유사를 껴안고 여러 번 울었다고 한다.
곽영대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민족에게도 귀중한 이 책이 어떻게 소실되지 않고 5백년을 넘게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 때에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사학과 교수며, 한국 서지학의 개척자였던 이인영(李仁永, 1911∼?)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고미술품을 매우 좋아하여 자신의 사랑방을 고미술품 감상실로 꾸밀 정도였고 사학이 전공인 교수답게 고서적도 좋아했다. 그가 박봉의 생활고를
견디면서도 이 나라의 뿌리를 밝혀 준 「삼국유사」를 소장하고 있었던 것은 안목 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명감의 발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이 되자, 그는 소련 군정에 위협을 느끼고 월남하여 서울에 머물렀다. 서울에 정착한 그는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자 소장했던 고미술품을 대부분 1948년 남산 고미술품 전시회에 출품해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바로 이 경매장에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낙찰받은 사람이 바로 이병직이다. 그런데 경매가 있고 2년이 지나자 불행한 일이 생겼다. 이인영이
난리통에 어이없게 납북된 것이다. 그는 미처 피난 갈 틈도 없이 서울을 장악한 인민군에게 끌려가 지금까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인영의 손을 거쳐 할아버지 이병직이 애써서 구한 삼국유사를 보물 제 419호로 지정 받은 건 1965년
4월 1일의 일이다. 자랑스러움 속에서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곽영대의 머리 속에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이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후 곽영대는 불심에 귀의하기로 마음먹고 불경을 공부하며 때로는 명산대천을 떠돌아다녔다. 생활고니, 세간의 부질없는 집착 따위는 털어
버리고 진정한 득도를 위해 험난하다 싶은 수행자의 인생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3년의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이었다. 초막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곽영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란 두꺼비 한 마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 두꺼비였다. 그 역시
놀란 눈으로 두꺼비를 바라보자, 두꺼비는 슬며시 숲으로 사라졌다. 그 일이 있고 서 곽영대는 마음의 눈이 열렸다. 그 후 10년을 넘게 포교사로
활동하고 1996년 10월, 드디어 삭발을 하고 도혜라는 법명으로 부처님께 완전히 귀의했다. 삼국유사를 통한 일연 스님과의 귀중한 인연이 이렇게
열매맺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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