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석사 대웅전 중건
***高麗山 積石寺 大雄殿 上樑文***
名山 選勝을 合하여 積石寺가 있으니 高句麗 長壽王4(西紀416)年 天竺祖師가 高麗山 정상
五蓮池에 臨하시어 다섯송이의 蓮花를 空中에 날리시고 그 중 赤蓮이 떨어진 落照峰아래
터를 잡아 赤蓮寺를 創建하시니 오늘날 積石寺의 옛이름이다.
朝鮮 肅宗때 세워진 積石寺事蹟碑와 舊韓末에 제작된 傳燈本末寺誌 및 江都誌에 의하면
高麗時代에는 藏經都監이 設置된 禪源寺에서 板刻된 藏經板을 옮겨 보관하기도 했으며
朝鮮 宣祖 임금의 젓째따님이신 貞明公主가 暴君光海를 피하여 이곳에 머물기도 했고
積石寺 소유의 田沓이 江華 전 地域에 分布되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寺勢가 隆盛 했었음을
짐작케 한다.
朝鮮朝 中宗39(西紀1544)年에 重修의 記錄이 있으며 宣祖26(西紀1539)年에는 妙淨스님과
仁祖12(西紀1634)年 戒賢,三昌스님, 肅宗31(西紀1705)年 學均,普益,勝鑑스님에 의하여
重修되었으나 西紀1911年傾 당시 陸軍參領이었던 江華眞衛隊長 李東輝가 美國宣敎師인 벙커,
基督敎 牧師인 朴能一과 談合하여 私立學校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積石寺 財産을 강제
沒收함으로서 寺勢가 기울어 廢寺의 地境에 이르렀다.
近代에 이르러서는 己未(西紀1919)年에 朴南夏스님이 大法堂을 毁撤하였고 石譚스님
代에까지 근근히 命脈만 유지해 오다가 1984年 道岩스님이 大雄殿을 지었다.
1997年 現 禪巖스님이 住持로 赴任하였으며 1998年 8月 大洪水로 因하여 進入路가
끊어지고 大雄殿을 비롯 寮舍2棟이 流失되는 被害를 입었다.
1999年에 進入路 確包裝과 築臺를 새로 築造하였고 落照臺와 山神閣을 整備하였으며
西紀200年에는梵鐘樓를 新築하고 2002年에는 積石寺事蹟碑가 地方有形文化財 38號로
지정 登錄되었으며 同年 1月에는 觀音窟을 新築 四十二手觀世音菩薩像을 奉安했고
2003年에는 碑閣을 新築했다.
이제 海東第一祈禱道場의 大雄殿을 復元하려 함에 信心있는 檀越과 住持 禪巖스님
願力으로 材木을 求하여 佛事를 일으키어 먹줄을 놓아 도끼질 톱질 모두 精誠을 다 하니
外七包 內九包의雄壯함이 드러남에 큰 대들보를 올리며 長老의 頌歌를 본 받는다.
어영차 들보를 東쪽으로 들어 올린다.
藥師如來 瑞氣光彩 어둠뚫고 밝았구나
無量衆生 生死苦桶 法藥으로 快癒토다.
어영차 들보를 西쪽으로 들어 올린다.
九品蓮臺 阿彌陀佛 眞心으로 十念하면
往生淨土 이룩하여 安樂平和 누리리라.
어영차 들보를 南쪽으로 들어 올린다.
保勝如來 歡喜國土 風月이 한가로워
善財童子 南巡길에 一百城이 짧도다.
어영차 들보를 北쪽으로 들어 올린다.
大千世界 無憂國土 이룩하니
太平歌 한 曲調를 누구나가 부르도다.
어영차 들보를 위로 들어 올린다.
도솔천 內院宮에 彌勒菩薩 앉았으니
아침향 저녁촛불 供養올려 우러르다.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들어 내린다.
吉地의 祈禱道場 積石寺 大雄殿은
無量世界 無量衆生 濟度의 터전이다.
道場 한 켠의 염화미소는 오가는 이의 발길을 붙잡아 冥想과 休息을 提供하고
甘露井에 넘처나는 맑은 물은 世事의 吉凶을 點指하나니 이는 葛藤과 不和를 보듬어
淨化키 위함이로다.
엎드려 願하옵나니 觀音窟 위에 우뚝 솟은 大雄殿의 威雄과 觀音窟의
四十二手觀音菩薩의 威神力 으로 上求菩提 下化衆生케 하옵시며 三月과 十月에 行하는
放生祈禱와 每月 마지막 주 土曜日 三千拜 徹夜祈禱의 精進力은 부처님 加被의
根源이 되게 하옵소서…
이에 더하여 七千萬 民族이 하나되어 平和統一의 밑걸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後人들은 이 伽藍을 더욱 保護하고 勇猛精進하여 佛國土 建設에 邁進할지어다.
佛紀 2548年 (甲申) 陰8月 9日
檀紀 4337年 西紀 2004年
居士 東坡 鄭 偵 植 謹 撰
居士 愚石 李 堯 煥 謹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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