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발소리에 자란 수박
제주일보
승인 2021.07.22
김길웅 칼럼니스트
7월 들어 며칠 비가 질척이더니 장마가 걷혔다.
조기 퇴장이다. 곧바로 폭염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아침부터 푹푹 찌기 시작한다. 33도로 첫 폭염경보라더니,
육지 어느 곳은 35도까지 끌어올렸다. 세상 벌컥 들쑤셔 놓은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게 폭염이란다. 기상 캐스터가 지레짐작으로 한 말이 아닐 것이다.
화기를 퍼트리며 아파트로 달려드는 햇볕에 베란다도 구실을 잊었다.
그런다고 블라인드를 내릴 수도 없다.
펄펄 끓어도 간간이 밖을 내다봐야 한다.
더위를 말없이 견뎌내는 숲이 있잖은가.
무풍한 데도 시종 부동으로 서 있는 나무들은 외려 이 여름을 즐긴다.
목표가 있다. 광합성으로 시간의 두께만큼 굵어 가며 키를 키운다.
앞 동 화단의 두 그루 때죽나무, 봄에 눈처럼 흰 꽃으로 덮이더니 꽃 지고
잎 돋으며 번무해 그새 한두 뼘은 자라 올랐다.
아파트 일 층 유리창 반을 가려 놓았다. 참 놀라운 생명력이다.
나무들은 멀뚱히 서 있지 않다. 심을 ‘植’ 자로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
순간순간 빈 데를 메우며 벋고, 구름 흐르는 하늘을 향해 치솟는
나무들의 저 활기.
“선생님, 댁에 계시죠? 서귀포에 볼일이 있어 나선 길에 잠깐 들르려고요.”
‘어허. 이 불더위에?’ 하려는데 핸드폰이 꺼져버린다.
동생같이 아끼는 친구지만 펄펄 끓는 날씨다.
조천에서 신제주까지 올 일이 무언가.
하긴 저 하자 한 걸 마라 한다고 그만 둘 그가 아니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외 동반으로 어느새 현관문 앞에 와 있는 그가 컨테이너를 급히 내려놓는다.
“수박입니다. 바로 가야 합니다.” “이런, 더운데 땀이라도 들이고 가야지,
이 사람아.” “아닙니다. 그럴 일이 있어요.”
현관문을 나서며 요즘 볕에 탄 얼굴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 웃고 있지 않은가.
손을 들려는데 문이 닫힌다.
큰 수박 두 덩이. 생전 처음 보는 슈퍼 수박이다.
옮겨 놓는다고 들으려다 깜짝 놀랐다. 들돌 같다.
눈 휘둥그레져 어쩔 바를 모른다.
퇴근길에 들른 큰아들이 끙끙대며 겨우 해체 작업을 해 서로 나눴고,
작은아들도 와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태웠다.
커서 놀랐는데, 하도 달아 또 한 번 놀랐다.
가족 열 입이 더위를 식히며 크다 달다 껍질이 얇다 별나게 씨가 적다
품평들을 했겠다.
수박을 가져다준 이, 동생보다 더 아끼는 양재봉 수필가. 서예가, 환경운동가,
미생물연구가, 서각가, ‘家’ 자로 일가를 이뤄낸 그다. 맛에 홀려 끝물에야
그냥 수박이 아니라는 데 감이 꽂혀, ‘어떻게 나온 수박이냐 물었더니,
말로 불통일 걸 짐작했는지 메일이 왔다.
그는 고래등 같은 3층 집에 넓은 채마전을 끼고 산다.
“닭 17마리, 개 2마리 키우면서 모은 계분과 견분을 풀에 섞어 유산균을 넣으며
거름을 만들었다. 이걸 2월에 구덩이를 파 다섯 번쯤 갈아엎었다.
4월에 모종을 심고 유산균을 이틀에 한 번 주며 보듬었다.
물론 농약도 뿌리지 않았고 화학비료는 근처를 스치지도
몰라보게 몸집을 키우매 그중 큰 것부터 주인을 정했다.
첫 번째 주인은 선생님이다. 우리 부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쑥쑥 큰 것들이다.
드시고 여름을 시원히 났으면 좋겠다. 참외랑 무화과가 익으면 다시 찾아뵙겠다.”
수박의 탄생 서사를 읽으며 더위도 잊고 가슴 뛰었다.
고맙네, 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