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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 War(맹호부대)

월남 참전기~백마부대 한철용 소대장

by 동파 2021.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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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참전기~한철용 소대장

한철용(예비역 육군 소장)

소대장(백마사단)


1971년 5월 나는 중위로 빠레뜨호(월남전 병력 수송선)를 타고 월남 캄란항에
도착했다.
저 멀리 포탄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포성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전쟁터임에는
틀림없었다. 백마부대 소대장 요원으로 그동안 강원도 오음리에서 파월교육을
받고 월남에 상륙한 것이다.
내가 월남전에 지원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의 운명을 시험하기위함이었고,두 번째는 전투경험을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운명론자였다.내가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늘의 뜻이고 월남 전투에서
살아 남으면 앞으로 군대 생활에 희망이 있을 것이고 희망이 없다면 월남전에서
인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또 나 자신이 초급 지휘관인 소대장으로서 처절한 전투를 해보지않고 연대장이나
사단장 같이 높은 지휘관이 되었을 때 양심의 가책없이 전투시에 부하들에게
용감히 싸우라고 명령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명한 장군들은 초급장교 시절에 크고 작은 전쟁에 참전하여
전투경험을 쌓았고 빗발치는 총탄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다.
전투에서 내 생명이 아깝듯이 부하의 생명도 귀중하다는 철학을 몸소 터득해야
전장에서 부하를 죽이지 않고 승리 할 수 있기 때문에 전투 경험을 쌓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제주 월남 참전자 전우 백마사단 사령부 앞 2019년)

 

장갑차(APC)의 호위를 받으며 백마사단 사령부(닌호아 소재)에 도착했다.
이동 중에도 간간이 총성이 들려와 매우 긴장되었다.
같은 제대에는 동기생 윤 중위도 있었는데 그는 사단 사령부 지역의 29연대로 가고
나는 백마부대에서 제일 적정이 많은 투이호아 지역의 28연대(도깨비부대)
소대장으로 분류되었다.
소문에 28연대 지역에는 베트공이 우글거려서 소대장들의 인명피해가 많은 곳이라
모두가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해병대 고(故)이인호 소령이
전사한 곳이 돌산으로 유명한 혼바산(일명 Finger Mountain)인데 그 산이 바로
투이호아28연대 지역에 있고 그 유명한 나민하 중위가 매복 작전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던 곳도 28연대 지역이다.소위 소대장은 소모품이라는 악성 소문 때문에
강심장인 나도 그날 밤은 불안감으로 잠을 거의 이룰 수가 없었다.
후배들이 왔다고 선배(육사21기 이 대위,유사24기 박대위)들이 맥주를 사주어서
마셨는데도 술이 취하기는 커녕 정신이 더 맑아 지는 것 같았다. 아마 사선(死線)
에서의 긴장 때문이었으리라.

이튼날 헬기(UH-1H)를 타고 동지나해의 해안을 따라 1시간가량 북쪽으로 비행하는데
연대본부 직전에 그 유명한 돌산 혼바산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틈에 숨은 베트공의
총알이 헬기쪽으로 날아 오는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소 긴장되었다.
연대본부는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고 모래밭 위에 세워진 임시 건물들을 사용했다.

나는 28연대(도깨비 부대) 수색중대 1소대장으로 명령이 났다.
연대의 가장 용감하고 정예자원으로 구성된 수색중대의 소대장으로 근무하게되어
무척 기뻤다. 약 40명의 소대원을 모아 놓고 "우리의 목표는 살아서 귀국하는 것이다"
라고 목표를 제시한 후 그러기 위해서는 파땀 어린 훈련만이 살아 남는 길이라고
강조하며 전투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그 결과 나의 소대원 중 부상자는 있었지만 다행히 전사자는 1명도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작전 나가서 소대장이 제일 신경써야 할 부분이 바로 병사들의 실탄 소비에 대한
통제이다.
보통 정글에 한번 작전 투입되면 최소 1~2주를 작전하는데 훈련 안된 사병들은
한 번의 교전으로 가지고 있는 실탄을 다 쏘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기지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베트공과 마주 칠 경우 실탄이 없어서 속수무책
으로 당했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분대장들에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실탄 1탄창씩은 왼쪽 윗주머니에 마지막까지
보관토록 지시하여 기지에 돌아오면 확인하고 나는 실탄 1탄창은 철모띠에 끼우고
나머지 1탄창은 분대장과 같이 왼쪽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서 인지 이런 유비무한의 자세 덕분에 우리 수색 소대는 적의 매복에 의한
기습공격을 당해 본적이 없었다.

(작전이 심했던 혼바산)

베트공과 교전

소대장으로 부임 후 1개월 만에 소대 단독 수색 정찰 작전을 나갔다.
헬기에 나누어 타고 정글 깊숙이 들어갔다. 밤에는 베트공의 불빛이 정글에서 세어
나와 포병 관측장교(FO)에게 통보하여 포병 집중사격을 유도하곤했다.
한번은 작전간 밤에 숙영을하는데 병사들이 수류탄과 크레모아를 함부로 다루는 모습이
매우 위험해 보여서 기겁을 한적이 있다.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오히려 접근하는 적을
격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역설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숙영지를 편성한 후 소대 지역을 한 번 둘러보는데 가면(假眠)을 취하는
병사들이 베개를 만든것이 수류탄 4발을 땅에다 놓고 그 위에다 크레모아를 얹혀놓은
게 아닌가.나는 놀라서 안전상 큰 문제라고 했더니 소대장은 월남 신출내기라서 그런지
겁도 많다면서 안전핀이 있기 때문에 아무 이상이 없으며 오히려 밤에 적이 기습하는
경우엔 베개 밑에 있는 수류탄을 바로 집어서 던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야 말로
전술적인 수류탄의 정위치라는 것이었다.이래서 전투 경험이 필요한 것이고 경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작전 중에 또 한 번은 헬기로 실탄과식량등 군수물자를
지원받았다.
중대장이 부쳐준 라면과 맥주 1캔의 맛은 그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가 없었다.
4~5일을 내내 미국 전투 식량인 씨레이숀(C ration)만 먹었더니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영어를 모르는 병사들이 뚜껑도 열어보지 않고 씨레이숀 통조림의 종류 즉 내용물을
척척 알아맞히는데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들어 무게를 측정하고 흔들어서
소리를 듣고는 어떤 것이 고기인지 과일인지 아니면 스파케티인지 척척 알아맞혔다.
너무나 신기했다.

1971년 여름에 연대 규모 작잔이 "스이까이"계곡 일대에서 개시되었다.
이 작전에서 우리 소대가 적의 기습을 받아3명이나 부상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소대는 중대의 첨병 소대로서 적진을 향해 전진하고있었다.
나는 첨병부대의 4번째 위치하고있었다. 맨 앞에는 첨병 2명,다음에는 첨병 분대장,
그 다음이 소대장인 나의 위치였다.본래 소대장은 소대원의 중간이나 또는 3분의2지점(2/3)
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월남전에서는 소대장이 선두 그룹에서 진두지휘를 하지
않으면 즉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으면 전투에서 백전 백패하기 때문이다.
한참 정글을 헤치며 일렬종대로 전진하고있는데 첨병이 정지 신호를 보내왔다.
그라고는 소대장을 불렀다. 밭에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밟힌다는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무엇인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손으로 파보았더니 155미리 포탄의 탄통이 나왔다.
우리는 순간 흥분하기 시작했다.
베트공의 무기고를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월남에서는 베트공의 무기만 획득해도 전과 그 자체였다. 소대원들은 모두가 흥분하여 그
일대를 수색하며 땅 속에서 포탄의 탄통을 캐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무기고가 아니고 식량창고였다. 포탄 통안에 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포탄 통 약 50~60개를 캐내었다.
군량미를 획득한 것도 사실은 전과로 볼 수 있는 경우지만 월남전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무척 섭섭했다.일단 흥분한 소대원들은 식량 창고가 있는것으로 보아 근처에 무기고도 있을
것이라면서 계속 수색할 것을 건의하였다.이 때 소대장인 내가 좀더 냉정을 찾았어야했는데
나도 그만 흥분하고 말았다.
무기고만 찾아내는 날이면 소대의 훈장이 무더기로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나는 흥분한 나머지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다. 식량 창고가 있다는 것은
베트공의 근거지라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단순한 은익장소로만 판단한 것이 내 잘못이었다.
소대원들이 처음에는 침착한 태도로 보이다가 포탄 통이 계속 나오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베트공들은 자기 기지 방어하기 위해 크레모아를 미리 설치해 두는둥 이미 만전의
준비를 완료하고 우리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흥분하여 무기고를 찾기위해
전진하자 적이 우리 첨병분대를 향해 크레모아 발사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이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3명이 쓰러졌고 나도 쓰러졌다.그러자 적과 우리사이에 교전이
시작되었고 총알이 빗발쳤다. 순간 "당했구나!여기서 전멸할 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팔다리를 움직여보았다.움직일 수있었다.
순간적으로 다쳤구나 했는데 괜찮았다. 첨병을 보니 개구리처럼 배를 하늘로 향해 완전히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즉사한 것으로 보였다. 뒤에서는 훈련 받은대로 소대원들이 적을
향해 계속 응사하고있었다.
조만간 바위를 방패삼아 적진을 보니 적들이 부상 동료를 구출하려는 아군을 저격하려고
조준 사격 자세를 취하고있었다. 저기 앞에 쓰러져 있는 부상병을 어떻게 구출하느냐가
문제였다. 일단 구출한 후에야 다음 단계로 들어가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대장을 큰소리로 불렀다.
그는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빨리 빠져나오라고 했더니 내 옆으로 빠져나왔는데
이미 멍하니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였다. 계속 고착견제 사격을 하며 부상 당한 첨병을 보니
2면중 1명은 혼자 힘으로 기어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계속 조준사격 준비 중인 적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그 쪽을 향해 사격하였다. 그래서 앞에 있는 부상자 3명중 2명은
빠져나왔는데 좀 떨어진 곳에 벌렁 누워있는 첨병이 문제였다. 움직이는 것을 보니
죽지는 않은것 같았다.
뒤에 있는 부분대장 조를 시켜서 구출할까 했다가 피해가 더 나면 안 될것 같아서
소대장인 내가 직접 구출하기로 결심했다. 엄호 사격을 부탁한 다음 튀어 나가서 부상병을
껴안고 뒹굴었다. 경사진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굴러서 방패로 삼고 있는 조그만
바위 뒤에 도착하자 적의 집중 사격이 바위를 향해 쏟아졌다. 그때 쏟아지는 적의 총알로
돌가루가 먼지가되어 피어 올랐다.
그 때 처음 돌가루 냄새를 맡아보았다.
구사일생으로 내 앞에 있던 부상자 3명이 모두 구출된 것이다. 그런데 나만은 멀쩡했다.
신의 가호 때문이었다.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소대원이 있는 쪽으로 빠져나왔더니
소대원들이 소대장 살았다고 나를 얼싸 안고 울어댔다. 적진에서 소란 피우고 집결해
있으면 안된다고 호통을 친 후 진지 재배치 및 경계강화에 들어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느데 무려 40분 동안 교전했던 것이다. 울창한 정글 때문에 시계가
막혀 멀리 앞을 볼 수 없었고 소대장이 보이지 않아 죽었거나 부상당한 것으로 여기고
중대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적과 마주보면 교전한 인원은 첨병분대 요원 뿐이었고 나머지 소대원은뒤쪽에서 높은
곳에 있는 적의 진지를 향해 고착견제 내지는 엄호사격만 할 수 있었다.
정글 때문에 뒤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상은 당했어도 죽은 사람이 없어
소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소대원을 안전한 곳으로 일단 철수시킨 후
무장 헬기를 요청하여 그 적의 진지에 로켓으로 사격토록했다.내가 직접 무전기를 잡고
헬기장교(동기생 문희은 중위)에게 표적을 통보하자 무장 헬기가 적진을 강타하였다.
문희은 중위가 동기생이기 때문에 미국의 무장 헬기(Gunship)로 성의를 다하여 로겟과
기관총으로 적진을 강타를하여주었다.
그런데 그만 날이 어두워서 더 이상 보복 공격을 못했고 이튼날 작전이 종료되는 바람에
전과를 확인하지도 못하게 되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무장 헬기의 강타로 적의 피해는
막심했으리라고 확신 할수 있었다.
그 작전에서의 교훈은 작전지역에서 너무 흥분하지 말고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소대원이 부상당했지만 전부 구출되어 다행이었다.
한편 무장 헬기가 적진을 강타하는 동안 후송헬기(더스호프 Dust Off)를 불러 부상자를
야전병원으로 후송시켰다.1명이 중상이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요청한지 30분 만에 미군 후송 헬기가 도착하여 환자를 후송 시킬수 있었다.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1명도 죽은 부하가 없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또한 치열한 전투도 값진 경험이었다.

월남전에서 우리 병사들이 용감히 싸울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죽거나 부상당하면
전우가 반드시 구출한다는 것이었고 또한 현장에서 즉사만 하지 않으면 후송 헬기가
신속히 응급 처치하여서 죽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경우도
후송 헬기고 즉각 후송하지 못하면 정글에서 도보로 후송시키는 방법밖에 없었을 텐데
그럴 경우에는 10시간 이상 걸려서 중상자는 물론 경상자까지도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철수 후에 캄란 후송병원에 병문안 갔었는데 모두가 잘 치료를 받고 있었고 건강한
상태였으며 팔다리가 잘린 병사가 1명도 없어서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중에 영원한 장애자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었다. 그런데
첨병 분대장은 얼마나 놀랐는지 전쟁 공포증 증상이 나타난다고했다.

월남 참전중 죽을 고비를 넘겼을 뿐 아니라 위험한 순간에 부하들이 가벼운 부상을
당했으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소대장으로서 순간적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였던 사실이 지금도 가숨 뿌듯하게 남아있다.

 

제주 월남참전기념탑 책자에서(2021년 3월 25일 발행)
제주 월남 참전자회 정 동파 옮김

김세훈 맹호전우 한철용 장군 정동파 멩호전우